돈이나 명예보다 중요한 게 건강이라지만 한국인의 건강에 대한 강박증은 유별나다. 단순히 하루 세 끼를 챙겨먹는 것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각종 비타민제 등 건강기능식품을 챙겨 먹는다. TV방송과 광고는 건기식 열풍을 더욱 부채질했다. 매출을 끌어올리려는 관련 업계와 자신의 이름을 홍보하길 원하는 일부 의사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쇼닥터 문제도 불거졌다. 의학적 지식이 전무한 시청자는 의사나 한의사가 방송에 출연해 하는 말을 거의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한 의사가 과일, 채소 등 음식만으로 신진대사에 필요한 영양소는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며 ‘비타민·건강기능식품 무용론’을 주장,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국내에선 잘 활용되지 않았던 메타분석을 통해 건기식에 대해 과대 홍보되거나 잘못 알려졌던 정보를 가감없이 대중에게 알리자 관련 업계는 바짝 긴장했다. 주류 의학계에서는 대부분의 의사와 다른 행보를 보이는 그를 두고 ‘튈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시샘 섞인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반응엔 아랑곳하지 않고 국민 건강지킴이로서 제약회사나 건기식업체 또는 쇼닥터를 향해 바른말, 쓴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명승권 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대학교 암관리정책학과 교수(가정의학과 전문의)가 이런 화제의 주인공이다.
명 교수가 지금처럼 바른말 잘하는 성격을 갖게 된 데에는 대학시절 학생회 및 동아리활동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사람은 진실하고, 정의와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배웠다”며 “대학입학 후 학생회와 노래동아리(서울대 의대·간호대 ‘소리’) 활동을 하면서 정치·사회·역사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고, 불의와 거짓에 대해 저항하고 행동을 통해 바꿔나가야 한다는 소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명 교수는 국내 의사 중 가장 독특한 이력을 자랑한다. 개그맨 시험에 지원한 것과 SBS 구성작가로 근무한 게 대표적인 예다. 그는 “초·중·고 시절부터 교회에서 친교부장을 맡아 레크레이션 사회를 많이 보면서 유머나 개그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이로 인해 의사뿐만 아니라 개그맨도 장래희망 중 하나가 됐다”고 회상했다.
1994년 2월엔 겨울방학을 이용해 서울대 의·치대 역도부 후배였던 주웅 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교수와 듀엣으로 KBS ‘제3회 대학개그제’에 출전했다. 20팀이 겨루는 본선 진출에 성공, 설특집 전국방송에 출연했지만 연습량이 부족해 본선 입상에는 실패했다. 아쉬운 마음에 SBS 개그맨 채용시험에 응시하려 했지만 나이가 25살이 넘어 지원 자격에 미달했고, 대신 SBS 구성작가 시험을 봤다. 다행히 3차 면접까지 통과해 1994년 3월부터 5개월 간 구성작가로 활동했다.
작가가 되면 바로 대본을 쓸 줄 알았지만 그 정도 능력을 갖추려면 1~2년 이상의 트레이닝이 필요했다. 당시 명 교수는 본과 4학년으로 졸업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작가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학과 공부에 충실하지 않아 성적이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무사히 졸업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개그맨 및 작가에 대한 꿈은 잠시 꺾였지만 의사·교수·메타분석 전문가로서 방송에 출연하면서 긴장하지 않는 데에는 당시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2002년 6월에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병원을 개원했지만 환자가 적어 10개월 만에 문을 닫아야 했고, 2003년 6월부터 국립암센터에서 일을 시작했다. 2005년에는 다른 동기들보다 다소 늦게 서울대 대학원 의학과 예방의학 석사 과정에 들어 갔다. 여기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해준 메타분석이라는 연구방법론을 처음 접하게 된다.
메타(meta)는 ‘넘어서는’, ‘한 차원 높은’ 이라는 의미로 메타분석(meta-analysis)은 개별적인 연구를 종합해 분석하는 통계 및 연구방법이다.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여러 연구디자인 중 최상위 근거수준을 제공한다. 예컨대 비타민C 보충제를 매일 복용하면 감기를 예방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임상시험에서 한 연구는 비타민C 보충제가 감기발생 횟수를 줄였다는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는 반면 다른 연구에서는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부정적인 연구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런 경우 개별적인 임상시험 결과를 한번에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임상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얻을 수 있다.
명 교수는 “메타분석은 1970년대 이후 심리학·사회학·교육학 분야에서 활용되기 시작해 1980년대 중후반부터 의학계에서도 사용됐지만 국내의 경우 독학을 시작했던 2005년 경에도 여전히 메타분석 개념이 생소했다”며 “꾸준히 관련 논문을 발표한 결과 2010년 이후부터 국내 의학계에서도 메타분석이 많이 알려졌고, 요즘엔 각 과에서 진료지침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개별연구를 종합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각각 연구에 제한점이 많다면 이를 종합한 메타분석도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현재로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근거를 제공하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독학으로 메타분석법을 익혔고 2007년 2월 메타분석을 이용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학협회지(JAMA)에 비타민C·E, 베타카로틴, 셀레늄 등 항산화보충제를 복용하면 오히려 사망률이 5% 높아진다는 메타분석 논문을 읽은 뒤 건강기능식품의 효능과 안전성에 의문을 품고 관련 메타분석 논문을 발표했다.
건강기능식품에 대한 명 교수의 쓴 소리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그는 저서 ‘비타민제 먼저 끊으셔야겠습니다 - 아무도 말하지 않는 건강기능식품의 진실’을 통해 비타민제를 비롯한 각종 건강기능식품의 기능 혹은 효능과 안전성은 아직 임상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일, 채소 등 음식만으로 신진대사에 필요한 비타민이나 각종 영양물질은 충분히 섭취 가능하다”며 “금연, 절주, 운동, 적게 먹기, 표준체중유지, 과일과 채소 골고루 섭취하기, 짜게 먹지 않기, 붉은색 육류섭취를 줄이기 등을 준수하면 건기식을 따로 섭취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진실에 침묵하는 동료 의사나 건기식 업체의 행태에도 경종을 울렸다. 그는 “여전히 현대의학의 틈새를 노려 허위와 과장을 일삼는 업체나 쇼닥터들이 많고, 이로 인해 적잖은 국민들이 질환 치료 시기를 놓치고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며 “의사, 한의사를 비롯한 전문 의료인은 임상적으로 근거가 확립되지 않은 각종 건강기능식품과 치료법을 환자나 일반 대중에게 권하거나 선전하는 것을 삼가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의학지식을 습득하면서 근거에 기반해 양심적인 진료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료인이 양심적으로 진료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비정상적인 의료수가와 의료체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명승권(明承權) 교수 약력
1988~1995 서울대 의학과 학사 2005~2007 서울대 대학원 의학과 석사 예방의학 2011~2013 서울대 대학원 의학과 박사 가정의학
1994.03~1994.07 SBS 3기 구성작가 1995.03~1996.02 서울대병원 인턴 1996.03~1999.02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레지던트 1999.02 가정의학과 전문의 취득 2003.06~ 국립암센터 가정의학클리닉·암예방검진센터 전문의 2008.03~2009.02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방문학자 2014.10~ 대한가정의학회지(Korean Journal of Family Medicine) 편집장 2015.02~ 국제암대학원대학교 암관리정책학과 부교수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