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어딜 가든 도토리를 찾아볼 수 있다. 예부터 도토리는 주로 떡이나 묵의 재료로 이용했다. 천재지변이나 전쟁 등으로 먹을 게 부족할 때 먹는 구황식으로 많이 먹었다. 먹을 게 풍부해지면서 도토리를 이용한 묵이나 떡은 주로 간식이나 반찬거리 또는 술안주로 즐긴다.
도토리묵을 포함한 묵은 언제부터 먹었는지 정확하게 기록된 자료가 없다. 고대 유적지에서 도토리가 출토된 것을 참조해 재배역사가 길다는 것을 추측할 뿐이다. 묵을 만들려면 먼저 곡식, 나무열매, 식물뿌리 등의 껍질을 벗겨 물에 불린 후 맷돌이나 분쇄기에 갈아야 한다. 이후 체에 걸러 가라 앉히는 방식으로 앙금을 낸다. 체로 거른 앙금을 물과 함께 죽 쑤듯이 약한 불에서 은은하게 오랫동안 쑤어야 탱탱한 묵이 만들어진다. 한시간 이상 쉬지 않고 한 방향으로 저어야 하므로 중노동이나 다름 없다.
묵은 전분(녹말)이 굳어 겔로 변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모든 전분이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게 아니다. 전분은 아밀로펙틴(amylopectin)과 아밀로오스(amylose)이 혼합된 다당류다. 글리코겐(glycogen)도 다당류의 일종이지만 겔을 형성하지 않는다. 아밀로펙틴만으로 이뤄진 찰전분은 겔화가 더디게 일어난다. 겔은 가열 시간이 길고 아밀로오스 함량이 높을수록 강해진다.
고구마, 감자, 쌀, 팥 등에도 전분이 풍부하지만 묵으로 만들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 재료는 아밀로즈보다 아밀로펙틴 함유량이 많아 겔화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묵은 양념장 맛으로 먹는 것이라며 평가절하하는 사람이 있다. 묵 자체는 밋밋하지만 각종 재료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변화무쌍한 식품이 된다. 대표적으로 도토리묵 외에 메밀묵, 올챙이묵, 청포묵 등이 있다. 녹두묵은 봄, 올챙이묵은 여름, 도토리묵은 가을, 메밀묵은 겨울에 먹어야 제격이다.
녹두묵은 노랑묵과 청포묵으로 분류된다. 노란색의 치자로 물을 들인 게 노랑묵, 아무 것도 넣지 않은 게 청포묵이다. 노랑묵은 완산팔미(完山八味) 중의 하나로 전주비빔밥에 빠져서는 안 될 재료다. 녹두묵 제조과정은 다른 묵과 다르지 않다. 수라상에 올랐던 탕평채는 녹두묵에 고기볶음, 숙주, 미나리, 물쑥 등을 넣은 무침이다. 녹두는 해열·해독 작용을 하며 여름철 보양음식이다. 피부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며 피부미용에 좋아 예부터 화장품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올챙이묵은 옥수수를 물에 붓고 갈아 걸러낸 앙금을 끓인 뒤 식기 전에 틀에 부어 찬물에 헹궈 건진 것으로 일반적으로 양념장과 함께 먹는다. 강원도에서 주로 먹으며 여름철 열무김치와 함께 먹으면 별미다. 말린 옥수수를 끓는 물에 불려 사용하기도 하며 생김새가 올챙이와 비슷해 이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옥수수묵, 올챙이국수로도 부른다.
도토리묵은 ‘동의보감’에서 ‘배가 부글거리고 끓는 사람, 불규칙적으로 또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대변을 보는 사람, 소변을 자주 보는 사람, 몸이 자주 붓는 사람은 도토리묵을 먹으면 좋다’로 쓰여져 있을 만큼 의학적 효과도 가진다. 성인병 예방, 피로회복, 숙취회복 등에도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 최근에는 여성의 다이어트식으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칼로리가 낮고 수분이 많아 적은양을 먹어도 배부르기 때문이다.
메밀묵의 주재료인 메밀은 잎(파란색), 꽃(흰색), 줄기(붉은색), 열매(검은색), 뿌리(노란색) 등의 색이 모두 다른 ‘오방지영물(五方之靈物)’로 예부터 먹는 것 이상의 대접을 받았다. 민간에서는 메밀을 먹으면 아들을 잘 낳는다는 속설이 돌기도 했다. 강원도에서는 지역에 따라 메밀묵을 기제사 등에 제물로 이용한다. 여름엔 김치국물에 메밀묵을 굵게 썰어 담은 묵사발로 먹으며, 겨울에는 뜨거운 장국에 말아 먹는다.
김달래한의원 한의사(전 경희대 한의대 교수)는 “도토리 속 타닌의 함량이 많으면 쓴맛이 강해져 불쾌한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적절한 농도라면 맛의 악센트 역할을 한다”며 “타닌은 평소 몸이 차고 설사를 자주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메밀은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해주며 몸에 열이 많아 피부에 종기가 자주 날때 먹으면 효과적”이라고 덧붙였다.
묵은 손가락으로 누르면 누른 자리가 바로 원상태로 돌아가고 두드리면 탱탱한 게 좋다. 색이 말갛고 투명한 게 좋은 녹말로 만든 것이다. 청포묵은 색이 하얗고 투명해야 하며, 올챙이묵은 노릇하고 뿌연 색감이 나야 한다. 도토리묵은 연한 갈색이 나고 손으로 만졌을 때 탄력이 있는 게 맛있다. 메밀묵은 색이 일정하고 툭툭 끊어지는 게 좋은 재료로 만든 것이다.
취재 = 현정석 엠디팩트 기자 md@mdfact.com * 본 기사의 내용은 동아닷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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