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장짜리 두툼한 달력을 벽에 걸고 어찌 지났는지도 모르게 10장을 뗐다. 시간이 그저 흘러가진 않았을 텐데, 딱히 떠오르는 잘한 일 하나 없다는 게 아쉽다. 계획을 잃어버린 채 시간을 사는 우리. 기대하고 마주하는 시간보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시간을 버텨내는 삶은 아닌지. 문득 스위스 두메산골을 걷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칼럼니스트·포토그래퍼 감성사진사 이두용
I 그대가 혹 지쳐 있다면 ‘스위스’ 하면 늘 만년설과 푸른 초목으로 이루어진 숲이 떠오른다. 알프스가 스위스만의 산맥은 아닌데 왠지 어릴 적부터 내 머리엔 ‘알프스=스위스’ 같은 공식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스위스에, 정확하게 말하면 스위스에서도 프랑스와 등을 맞댄 마티니(Martigny)에 도착했을 때, 대자연이 떡하니 버티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 여느 유럽의 평범한 시골 마을 풍광을 가진 도시가 나타나자 사실 조금 낯설었다.
▶기차역에 내려서 소소한 문화와 역사를 만나는 일도 좋은 추억이 되었다.높다란 건물 하나 없는, 자전거를 타고 두서너 시간이면 다 돌아볼 것 같은 작은 도시.
시내에도 서민 음식을 파는 소박한 레스토랑과 작은 사이즈 커피를 시켜도 “큰 사이즈도 마실 수 있지?”라며 많은 양의 커피를 내오는 착한(?) 주인장이 운영하는 카페 정도만 있었다.
사실 더 많은 여러 개의 상점과 레스토랑, 유명 패스트푸드 체인도 있었지만, 관심이 갈 정도의 매력은 아니었다.
반나절 만에 마티니를 대표하는 박물관과 곳곳에 있는 예술작품 등을 돌아보고 나니 다른 것에는 관심이 사라졌다. 그 일대에선 더 보고 싶거나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다른 스위스 명소도 검색해봤지만, 마티니에 일정이 있어 간 내가 다녀오기엔 먼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연스레 바쁘지 않은 일정을 끝내면 난 호텔 인근을 산책하거나, 며칠간 이미 몇 번을 찾아간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한국에서도 해보지 못한 여유를 부렸다. 낯선 나라, 생소한 도시에서 경우의 수가 적어 선택했던 산책과 여유. 신기하게도 철저히 준비했던 것처럼 필요한 시기에 내게 휴식이 되어주고 있었다. 나조차 모르게 몸과 마음에 쌓여가던 일상의 무게가 조금씩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II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면
내가 스위스의 외딴 도시 마티니까지 가게 된 건 그곳에서 출발해 인근 프랑스 샤모니까지 운행하는 산악열차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1906년에 건설된 이 열차는 스위스 외곽에서 프랑스 산악지역까지 23km의 길이를 90분간 달린다. 짧은 거리와 시간이지만 스위스와 프랑스 두 나라를 거치면서 알프스의 청정자연을 오감으로 만끽할 수 있다.
▶알프스에서 자생하는 동물과 자연환경을 빌려 온 인공미 없는 동물원마티니에서 출발한 열차는 수직의 절벽을 오르고, 아름드리나무가 빽빽한 숲을 지나며, 알프스 산맥을 가로질러 프랑스로 향한다. 글과 몇 장의 사진으로 표현하기에 부족할 만큼 그 경험은 대단했다.
그런데 열차를 타고 느끼는 다이내믹한 경험만큼 몇 개 안 되는 기차역에 내려서 수백 년 역사를 가진 소소한 문화와 역사를 만나는 것도 동화 같은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세계문화유산이 산재한 유럽 나라들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자연과 작은 마을의 묘한 조화. 마치 보이지 않는 깊숙한 꿀단지에 손을 넣어서 찍어 먹는 것 같은 기대 이상의 달콤함이었다.
변변한 이름도 없지만, 그림보다 아름다운 숲과 300명 남짓한 주민이 사는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고요한 시골 마을, 알프스에서 자연을 빌려 온 인공미 없는 동물원과 빙하가 녹아내린 물을 가두어 만든 천연 수영장 등 소소해 보이지만 특별한 것밖에 없는 이곳은 알고 오지 않았기에 하나하나가 더 가치 있고 특별해 보였다. 갑자기 받은 사랑 고백처럼 설랬다.
▶알프스 만년설의 빙하가 녹아내린 물을 가두어 만든 천연 수영장 열차를 취재하러 왔으니 열차를 타고 스위스에서 프랑스로 여러 번 왕복했다. 그리고 정차하는 역마다 내려서 그 마을을 돌아보며 사진을 찍고 그곳을 걷는 사람들을 만났다. 다소 외진 곳이라 길이 없을 것 같은 곳에도 신기하게 이정표가 있고 숲 쪽으로 길이 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숲길에도 어김없이 걷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절대로 사람이 다니지 않을 것 같은 숲에도 한참을 기다려보면 어김없이 커다란 배낭을 멘 사람이 나타났다. 편하게 차려입은 복장과 이미 숲에서 며칠은 보냈음직한 모습이 그들에 대한 궁금증을 점점 크게 만들었다.
"절대로 사람이 다니지 않을 것 같은 숲에도 한참을 기다려보면 어김없이 커다란 배낭을 멘 사람이 나타났다."
III 진정한 쉼을 원한다면
▶(위)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숲으로 향하는 부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아래)3년을 준비해서 쉼을 위해 스위스로 날아온 중년부부처음 말을 건넨 건 중년 부부의 모습이 꽤 정다워 보여서였다. 그들은 식수를 공급하도록 길가에 마련된 수돗가에서 물을 받고 있었다.
등에 메고 있는 커다란 배낭이 부부가 이미 며칠은 근처 숲에서 보냈다는 걸 증명해줬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둘의 차림은 깨끗했다. “우리는 네덜란드 사람이에요. 스위스에 오려고 3년 전부터 계획했어요. 어디가 걷기에 좋은지, 어디에서 텐트를 치고 잘 수 있는지, 물은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 왔지요. 유럽에선 트레킹과 백패킹을 즐기기 위해 스위스로 오는 사람이 많아서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보름을 생각하고 왔는데 오늘이 3일째예요.”
고작 숲을 걷고 흙 위에서 야영하기 위해 3년 전부터 준비했다니, 충격적이었다. 지친 일상을 피해 동남아시아의 휴양지로 떠나는 사람들, 누가 봐도 그럴듯한 유럽의 나라와 도시를 골라 짧은 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곳을 다니려는 사람들, 오랫동안 모은 돈으로 쇼핑과 오락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
여행에 정답은 없지만 나를 포함한 주변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해외여행은 보통 이랬던 것 같다. 열심히 살았으니 지친 몸과 스트레스 쌓인 마음을 위해 더 열심히 숲을 걷고 자연에 동화되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그들에겐 알프스가 고생이 아니라 진정한 휴식처가 분명했다.
▶둘의 표정이 어찌나 밝은지 마주한 나조차도 미소가 지어졌다.부부는 발걸음이 바빴다.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는 낯선 나라에서 만난 동양인에게 크게 미소를 선물하고 금세 자리를 떠났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숲으로 향하는 그들의 뒷모습이 내 눈에 들어와 박혔다.
그런데 부부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숲에서 젊은 청년 둘이 또 나타났다. 그들은 부부보다 작은 배낭을 메고 있었지만 차림만큼은 더 자연인에 가까워 보였다. “저희는 헝가리에서 왔어요. 둘 다 직장에 다니고 있는데 휴가를 내고 이곳을 찾았지요. 스위스는 워낙 자연이 좋아서 도시에서 지친 사람들을 쉴 수 있게 해줘요. 사실 자연에서 걷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딨겠어요.”
몇 마디 말도 나눌 새 없이 그들은 자신들의 갈 길을 향해 분주히 걸어갔다. 둘의 표정이 어찌나 밝은지 마주한 나조차도 순간 미소가 지어졌다. 그들에게 쉼이란 어떤 의미일까.
IV 주저하기에 인생은 짧다 나는 행복에 대해 늘 고민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한 번뿐인 인생이니 즐거운 일에 투자하라”고도 말한다. 그게 시간이든, 열정이든, 비용이든 즐겁지 않은 것에투자하는 건 아깝다는 생각이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그 무엇도 내겐 무용지물이니 말이다.
▶기차역에 내려서 소소한 문화와 역사를 만나는 일도 좋은 추억이 되었다.도시민에게 휴식은 필수다. 즐거운 노동이 얼마나 있을까 싶겠지만, 그대가 선택한 일이라면 힘든 가운데에도 즐거움의 이유를 찾아내는 게 좋다. 성취만을 즐거움으로 생각하면 의외로 만족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적다. 가능하면 소소한 즐거움의 조건을 걸어두자.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 괜히 만들어진 건 아닐 것이다. 힘들게 일했다면 쉬어야 한다.
“힘들게 일한 당신 떠나라”고 했던 광고 카피처럼 일터에서 잠시 떠나는 것은 쉼을 얻기 위해 물리적인 이동 역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스위스에서 자연에 동화돼 쉼을 얻는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쉼으로 피로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나’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우리나라에도 산행이나 캠핑을 통해 쉼을 얻는 사람은 많다. 도시에서 지친 사람들이 자연을 찾아 그곳에서 쉼을 얻는 일. 많이 닮았지만 다른 부분도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쉼을 얻기 위해 이국땅 스위스로 날아간 것이 아니었다. 오롯한 쉼을 위해 오랜 시간 구체적인 준비를 하면서 그 과정까지도 즐거움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런 과정 역시 그들의 바쁜 일상에 쉼이 되어준 건 당연했다.
쫓기듯 시간을 쪼개며 사는 우리에게 쉼은 어떤 의미일까. 지친 몸과 마음을 방치하듯 단순히 내려놓는 시간은 아니었을까. 쉼을 준비하는 즐거움과 오랜 기다림을 통해 오롯하게 갖는 쉼. 그저 몸과 마음을 가만히 두었던 내게 스위스의 작은 숲에서 만난 사람들은 “쉼도 열정적으로 준비하라”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COLUMNIST 이두용 월간 아웃도어 편집장, 뮤지션으로 10년 넘게 살면서 책·음반·여행사진을 찍으며 사진에 입문했다. 2009년 중동 요르단 5개 지역에서 사진전과 함께하는 거리 축제를 열었다. 영국 공군이 주최하는 사진전과 심장병 어린이 기금마련 국제행사에 초청 전시했다. EBS <세계테마기행> ‘요르단편’ 진행자를 시작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중이다. 저서로는 <오늘부터 행복하다>(부즈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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