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정은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북부를 지나 동유럽으로 이어졌다. 유럽에 머무는 시간이 더할수록 ‘유럽스러운’ 아름다움과 매력에 대한 감동이 무뎌진다. 매일 눈에 채워지는 것들에 대한 매너리즘이 원인인 듯하다. 하지만 ‘동유럽의 파리’라 불리는 프라하로 향하면서 약간의 설렘이 살아났다.
과거 유명 드라마 덕분에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리 생소하지 않은 도시이자 사랑받는 신혼여행지가 됐다. 특히 여성들에게 각광받는 이 곳이 나에게 매력발산을 해주길 기대해본다.
이지젯(유럽 내 운항하는 저가항공 중 하나)을 타고 공항에 도착하자 한국어로 기입돼 있는 도착안내 문구가 들어온다. 누적된 체력적 한계 탓에 피곤함이 밀려와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다음날 도심산책에 나섰다. 삐죽삐죽한 첨탑과 돔, 예술적인 건축물이 가득 시야를 채웠다. 하지만 유럽여행을 하며 느끼는 낯선 익숙함에 그리 새롭게 보이지 않는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고풍스럽다. 리스본의 빨간 지붕이 소박함을 상징했다면, 이곳은 고급스러운 골동품 가게의 지붕을 연상시킨다. 사뭇 ‘동유럽스럽다’는 애매한 표현이 어울릴 듯하다. 동유럽 향기가 더욱 달콤하다는 것을 비단 나만 느끼는 게 아닐 것이다.
# 프라하 : 팔색조 매력을 뽐내는 동유럽 최고의 관광지 프라하 여행은 단순하다. 민주자유화 운동의 근거지인 신시가지 ‘바츨라프광장’(Wenceslas Square)에서부터 볼거리가 집중된 구시가 광장을 거쳐 ‘프라하성’(Prague Castle)까지 느리게 걷다보면 자연스레 코스가 완성된다. 트램을 타고 구시가지의 시작을 알리는 ‘화약탑’(Powder Tower) 근처에 도착했다.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구시가지를 걷다보니 이내 프라하의 심장이라 불리는 구시가 광장에 이르렀다.
광장 바닥 돌의 푹신함은 여행자의 지친 발의 피로를 덜어낼 정도로 충분하다. 광장 한복판에 서서 한 바퀴를 둘러본다. 건축적 소양이 해박하지는 않지만 고딕양식의 ‘틴 성당’, 바로크 양식의 ‘성미콜라스 성당’ 등 시대별 건축양식이 오밀조밀 시야를 에워싼다. 사방이 건축박물관이다.
광장을 가로지르자 유난히 많은 인파가 몰려 있다. 구시가지의 랜드마크로 ‘오를로이’(Prazsky orloj)로 불리는 천문시계탑이다. 매시 정각이 되면 행해지는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프라하의 모든 관광객이 이곳에 온 것 같다. 종소리가 울리면 시계탑 상단의 창문을 통해 그리스도 12사도 조각상들의 행진이 진행되고 이후 황금색 수탉의 짧은 외침으로 30초간의 퍼포먼스는 끝난다.
기대에 비해 상당히 허술한 행위에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천문시계가 갖고 있는 의미는 행위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상단의 시계바늘이 있는 ‘아스트로라비움’은 천동설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하단의 달력 역할을 하는 ‘캘리더리움’은 농부들이 어떤 시기인지 파악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단순 ‘동그라미’ 판 안에 천체의 움직임을 반영해 모든 것을 집약시켰다는 위대함에 첫 번째로 놀랐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천문시계이며 여전히 작동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천문시계탑의 놀라움은 또 있다. 이 곳은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이자 소매치기가 가장 빈번한 곳이다. 내 눈앞의 한국단체 관광객 중 한명이 넋을 잃고 시계를 바라보다 소매치기를 당했다. 하지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많은 사람 속에서 범인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망연자실한 관광객의 표정이 속상함을 말해주고도 남는다. 비일비재하게 이런 일이 발생하니, 항상 주의해야 한다.
시계탑 앞 스타벅스 입구 주변에 앉아 인파를 3인칭 관점으로 바라본다. 이제 내겐 화려한 퍼포먼스 따위도 큰 의미가 없다. 멋스러운 건축물과 과거의 향내를 뿜는 유명 관광지의 놀라움은 오래되지 않아 인간의 고독함을 넘지 못한다. 애초에 혼자만의 여행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행위보다,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수많은 인파 중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와, 어떤 이는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휴대폰을 꺼내 커피숍의 약한 와이파이 신호를 잡는다. 수화기 너머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광장의 사람들은 환호하고 즐거움에 가득 차 있지만, 나의 가슴은 그리움에 사무친다. 지금도 프라하의 시계탑은 나에게 그런 의미다.
프라하성을 향해 걷다보면 구시가지를 연결하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카를교(Charles Bridge)를 만난다. 나는 프라하에 머무는 1주일 동안 수도 없이 이곳을 지나쳤다. 웅장하며 아름다운 성을 배경으로 그려진 이 다리의 자태는 아침, 오후, 저녁 모두 다르다. 하루는 한낮의 관광객 떼에 지쳐 이른 새벽 숙소를 나왔다.
조깅하는 현지인들 몇 명이 있고, 중국 관광객 소수가 그들만의 큰 언어로 이곳을 점령하고 있다. 해가 채 뜨기 전 새벽의 카를교가 하루를 알리듯 조용히 숨을 쉰다. 이윽고 해가 뜨고 오후가 되면 이곳은 예술가와 잡상인, 관광객이 섞여 활기차다.
다리 위에는 관광객을 유혹하기 위해 귀고리 따위의 잡상품을 파는 사람, 초상화를 그리는 거리의 화가, 수십년 동안 이곳에서 꾸준히 공연을 하다 노인이 되어 버린 밴드 등 보헤미안 예술가들이 많다. 그들을 감싸듯 양쪽으로 아름다운 동상이 다리의 분위기를 더한다. 하지만 불편하게도 구석에서 구걸하는 사람 중에는 허우대 멀쩡한 젊은 거지들도 많다. 아이러니하게 그 옆에서 다리에 기대 ‘프라하의 연인’을 찍듯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도 있다. 악사에 심취해 상념에 젖어 있는 사람, 사진을 찍기 바쁜 관광객들 등 다양한 이들이 이곳을 만들어 낸다. 흐르는 강과 푸른 하늘이 이들과 더해져 마치 조그만 왕궁 같다.
붉은 지붕이 낮의 프라하를 대표하는 이미지라면 환하게 빛나는 붉은 조명은 밤의 프라하를 덮는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의 성 비투스 대성당(St. Vitus Cathedral)의 불빛을 배경으로 화려한 조명들이 다리를 채운다. 이 화려함은 낮의 것과는 다르다. 프라하에 갔다면 시간에 따라 팔색조처럼 변하는 도심과 카를교의 다양한 매력을 놓치지 말아야한다.
평소 술을 즐겨 마시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맥주를 마셔보지 못한 게 조금은 후회스럽다. 소원을 이뤄준다는 카를교의 ‘성 요한 네포무크 동상’을 만질 때마다, 사랑하는 이와 꼭 다시 오겠다는 진정성 희망을 꿈꿨다. 조만간 미술관 같은 이곳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안주삼아 ‘필너스우르겔’을 마시길 기대한다.
# 부다페스트 : 유럽 최고의 야경 도시 거대한 강이 도심을 분리시키고 웅장한 다리들이 분리된 도심을 연결시키는 모습이 흡사 내가 가장 잘 아는 그곳, 서울 같다. 실제 모습을 본 후 왠지 부다페스트란 이름조차 웅장하게 느끼는 것은 기분 탓일까. 부다페스트는 도나우강(다뉴브강)을 중심으로 오른편(동쪽)의 부다 지구, 왼편(서쪽) 페스트 지구로 나뉜다. 서민들의 삶의 터전을 페스트 지구로 본다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귀족과 부호들이 살았던 부다 지구는 왕궁·어부의 요새 등 많은 유적지를 가졌다. 역사적 통념에서 바라본 지구의 구분은 강남, 강북의 나라와는 조금 다르다. 부다페스트를 최고의 여행지로 만드는 방법은 단순하다. 천천히 거닐면서 페스트 지구의 이곳저곳을 산책하고, 해가 질 무렵 세체니 다리를 건너 부다 지구를 구경하면 된다.
프라하를 떠나 8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곳에 온 이유는 두 가지다. 헝가리의 유명온천을 체험하고, 유럽3대 야경의 밤거리 보고 싶어서다. 헝가리에는 총 450여개의 온천이 있고 부다페스트에 100여개가 있다. 특히 이곳에는 ‘겔레르트, 라츠. 세체니’ 등 현지인 및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온천이 많다.
이른 아침 야외온천탕이 있는 세체니로 향하기 위해 지하철 1호선을 탔다. 지하철 역사의 에스컬레이터 속도는 우리나라 것에 비해 두 배 이상 빠르다. 그들의 급함은 우리나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할 텐데, 아마도 안전불감증인가 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앙증맞은 노란색 지하철(M1호선)로 갈아타고 세체니온천(Szechenyi Furdo) 역에 도착한다. 역사 밖을 나오면 노란색 건물의 온천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수영장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2개의 온천이 있는 모습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너무 큰 기대를 하고 갔다면 소문난 잔치인 많은 인파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단지 1900년대 초반에 지어진 건축물에서 낯선 이들과 동류를 느끼며 여유롭게 온천을 즐기는 경험은 충분히 값지다.
하지만 나에게는 세체니온천보다 그 옆의 시민공원이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시민공원에 세워진 안익태 선생의 동상 옆에 자리를 잡고 풀밭에 앉는다. 가방에서 항상 챙기고 다니던 항공담요를 꺼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높게 솟은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푸른 잎들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나를 향해 내리쬔다. 적당한 따듯함에 기분이 좋아지며 이내 잠에 빠진다. 여정이 종료된 지금도 종종 그런 순간이 떠오른다. 인도의 어느 도시에서, 히말라야를 올라가는 길에서 잠시 느낀 따듯함은 가끔 일상이 팍팍해질 때마다 더욱 그립다.
체코의 프라하 못잖게,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야경도 훌륭하다. 밤이 되면 환골탈태하는 건물의 모습은 부다페스트의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해가 부다왕국을 등지고 스물스물 넘어간다. 붉은 노을이 나를 그쪽으로 이끄는 것 같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언덕에 위치한 부다지구의 곳곳에서 보면 훌륭하다. 에르제벳다리를 건너 겔레르트언덕을 오른다. 언덕을 오르자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 시작하고 도심의 불이 켜진다. 도나우강을 수놓는 거대한 다리의 화려한 불빛 아래 유람선이 보인다. 그들이 뿜는 물살이 어항속의 피라미처럼 매끈하다. 강을 따라 세워진 가로등의 불빛이 강과 도심의 경계를 알리듯 세워져 있다. 저 멀리 우뚝 솟은 대관람차와 유난히 밝은 불빛을 내는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마치 저 강 너머에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가 있을 것 같다. 한국의 야경도 이와 비슷할 지도 모른다. 10년을 서울에서 살면서 내 주변을 둘러보지 못한 게 조금은 후회가 된다. 돌아간다면 꼭 아름다움을 찾아보리라 다짐한다.
부다페스트는 프라하처럼 아기자기 하지는 않지만 남자들이 좋아할만한 가슴 벅찬 거대한 웅장함을 담고 있다. 야경을 유난히 사랑하는 나에게 손에 꼽힐 정도로 황홀했다. 부다페스트의 조명기술을 배운다면 어느 나라도 야경 강국에 들지 않을까. 유럽 최고의 야경도시로 손꼽는 프라하와 부다페스트, 종종 나에게 조언을 요청하는 자가 있다면 여전히 최고의 신혼여행지로 이곳들을 추천한다. 직장인이라면 10일 정도의 시간 투자로 충분히 이곳을 즐길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최고의 야경도시 여행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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