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산사의 풍산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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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년 7월 21일 18시 08분


초복이 지나고, 중복과 말복도 눈앞이다. 늘 이맘때면 빠지지 않는 얘기꺼리가 있다. 더위를 이겨보겠다고 먹고 있는 어떤 탕에 대해서 말이다.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리라. 생각만으로도 답답함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그 논쟁을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개의 공존이 왜 필요한 것인가, 곱씹어보게 만드는 한 풍산개의 얘기를 전해본다. 두어 달 전에 절에 다니는 한 선배로부터 들었던, 그대로를 옮겨본다.

충청북도에 있는 한 조그마한 산사에서 살고 있는 풍산개 ‘똘망이’(실제 이름을 몰라 이렇게 불러본다)의 이야기다. 소설 같지만 실화다.

똘망이가 사는 절은 큰 절이 아니다. 산사의 식구는 스님 두 분과 보살님 등 모두해서 예닐곱 분 정도다. 살림살이도 넉넉하지 않다. 이야기를 들려준 선배는 서울에 사는데, 산사에는 1년에 네, 다섯 차례 다녀오신단다.

지난해 어느 날의 일이다. 똘망이가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 혼자 살던 똘망이가 새끼를 낳은 것은, 산길을 넘나들며 마을을 수차례 다녀온 뒤였다. 어찌 됐든 현실적으로 새끼를 키우기가 만만치 않다고 판단한 그 절의 스님은 신도를 대상으로 분양에 나섰다.

선배는 당시 스님으로부터 똘망이 새끼들의 사연을 듣고선 선뜻 두 마리를 데리고 왔다. 물론 스님과의 각별한 인연도 작용했다.

얘기는 여기서 부터다. 선배는 새끼를 분양받아 간 이후, 절을 찾을 때마다 똘망이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행동이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어떻게 달라졌을까. 혹시라도 짖거나, 물려고 덤비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똘망이는 이 선배가 산사에 들어서기도 전,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자신을 용케 알아보고 꼬리를 치며 달려 나와, 반갑다며 맴돌기를 한다는 것이다. 마중은 물론이고, 배웅도 해준단다.

처음에는 ‘왜 자기 새끼를 데려간 사람에게 반가운 행동을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왜 그럴까’, 오랜 시간 골똘히 생각해봤단다. 그리곤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풍산개(똘망이)는 내가 데려간 자신의 새끼를 어차피 찾을 수 없을 것이라 여기고, 쓸데없는 해코지 보다는 ‘내 새끼를 데려갔으면 잘 키워 달라’는 부탁의 인사를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며 받아들였단다.

더욱이 새끼를 데리고 간 후, 처음 다시 찾아간 것이 수개월만의 일이고, 당시에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었는데도 유독 자신을 찾아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은 다른 이유로 설명하기 어렵단다. 분명 자신을 새끼를 데리고 간 사람으로 기억한다는 것이다. 대단한 모성애가 아닐 수 없다. 얼마나 오매불망했으면 그럴 것인가. 이 선배는 그 이후 똘망이에 대해 그냥 한 마리의 개가 아니라 마치 영물처럼 여기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스님에게 들었다는 똘망이의 일화 하나를 더 들려줬다. 똘망이는 어느 날 산사로 들어왔다. 스님들은 그 생명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똘망이도 산사의 환경에 적응할 무렵의 일이다.

언젠가부터 새벽녘이면 법당 앞에 고라니, 오소리 등 산에 사는 짐승들이 죽음으로 놓여 있더란다. 그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된 후 똘망이의 소행이란 것을 알아차린 스님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스님도 처음에는 자신을 거둬준 사람을 위해 보은 차원의 행동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살생을 금기시 하는 곳에서 산짐승들이 죽어나가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우선, 개가 물어온 죽은 짐승들을 땅에 묻어주면서, 어떻게 하면 똘망이의 행동을 멈추게 할 것인가에 대해 해법찾기에 나섰다.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고, 참으로 답답한 시간이 흐른 뒤, 스님은 혹시나 하면서 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바로 죽은 짐승을 위해 영혼을 달래주는 일종의 약식 천도제를 지내주는 것이었다.

그동안 똘망이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죽음을 땅에 묻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천도제의 과정을 지켜보게 했다고 한다. 그러자 똘망이는 ‘짐승을 죽여 물어오는 일이 칭찬받을 일이 아니고, 잘못된 행동이란 사실을 깨우쳤다는 듯’이 이후에는 짐승을 물어오는 일을 멈췄다고 한다.

‘똘망이’이 대해 꿈보다 해몽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풍산개의 영민함은 차치하고, 대부분의 개들도 자신이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알고 있고, 가르침을 통해 더 잘 할 수 있다고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더 모를 뿐이다.

필자는 똘망이의 얘기를 떠올리면서 개와 사람이 공존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의 미래를 넉넉하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 사람과 개가 다를 게 무엇인가.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인 것을. 때론 개들이 못난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마저 들곤 한다.

무더운 여름의 한복판이다. 똘망이를 통해 앞서 거론했던 복날의 얘기꺼리 다툼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도 되새겨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즘 많은 이에게 실망을 넘어 절망을 안겨주는 뉴스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사족 같지만 그 뉴스의 주인공들이 똘망이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 문득 똘망이를 만나러 산사를 찾아가보고 싶어진다.

* 본 기사의 내용은 동아닷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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