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일본이 딱 그랬다. 전통을 고집하던 일식당들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식재료와 테크닉, 그리고 서구적인 플레이팅 감각을 익히고 귀국한 젊은 요리사들이 주목한 것은 예상 밖에도 일본 전통 식재료들이었다. 마침 세대교체를 막 마친 일본 방방곡곡의 식품 명인 2세들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던 터였다. 그들은 서로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고 강물에 몸을 맡기듯 컬래버레이션이 이루어지며 새로운 스타일의 창작 일식당들이 성시를 이뤘다. 게다가 일본의 경제적 호황으로 서양요리에 단련된 사람들의 입맛은 이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제2의 ‘화식(일식)’을 받아들였다. 당시 한 음식평론가는 이 현상을 두고 ‘누벨 화식의 시대’라고 불렀고 그렇게 일식은 ‘글로벌 다이닝’으로 도약의 발판을 다져 나갔다. 그로부터 다시 10년 후인 2008년, 일본에 ‘도쿄 미슐랭 가이드’가 전격 출간됐고 예상대로 미슐랭 가이드는 누벨 화식에 환호하며 별을 뿌렸다. 2016년, 한식에도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된 듯 하다.
세계 미식 트렌드의 한복판인 미국 뉴욕에서 미슐랭 스타를 3년째 유지해 오고 있는 ‘정식(JUNGSIK)’의 뒤를 이어 최근 1년 사이에 미국 내 새로운 모던 코리안 레스토랑의 오픈 소식이 줄을 잇고 있다. 최근 뉴요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레스토랑 중 하나로 꼽히는 ‘오이지(OIJI)’, 한식의 반찬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20개의 요리를 선보이는 ‘아토보이(ATOBOY)’를 비롯해서 “로스앤젤레스의 미래 식문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라는 현지 미디어의 찬사를 받은 로스앤젤레스의 ‘바루(BAROO)’, 직접 장을 담그며 한국식 발효로 맛을 내는 샌프란시스코의 ‘모수(MOSU)’ 등이 그렇다.
비단 미국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샌프란시스코에 등장한 새로운 한식당 ‘간(GAN)’은 이름부터가 한국에서 음식의 짠 정도를 일컫는 말이다. 한식에 김치나 바비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흥미로운 요리가 많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는 게 이곳 오너인 미국계 한국인 셰프의 포부다. 2013년 11월 시드니에 문을 연 ‘문팍(MOON-PARK)’은 이후 호주의 권위 있는 레스토랑 가이드 ‘굿 푸드 가이드’에 코리안 레스토랑으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모자’를 받으며 호주에 없던 한식을 소개해 오고 있다. 베를린의 가장 핫한 미테 거리에서는 아주 세련된 분위기의 코리안 레스토랑 ‘대몬(DAE MON)’을 찾을 수 있다. 독일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오너는 김치 무스로 맛을 낸 애구, 고추장으로 맛을 낸 대게, 간장을 사용한 돼지고기 등 한국 발효의 맛과 베를리너들이 좋아할 만한 터치를 가미한 한식을 선보인다.
비빕밥, 불고기로 대표되던 한식 메뉴를 뛰어 넘어 새로운 창작 메뉴로 해외 곳곳에서 한식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가고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한식을 받아들이는 세계의 안목이 달라지고 있음에 동의한다. ‘간’의 피터 청(Chung) 셰프는 “미국에서 한식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잘 훈련된 셰프들이 한식에 도전하기 시작한 덕이다. 그들이 한식을 재해석하면서 사람들도 한식에 대한 편견을 깨고 흥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뉴욕 ‘오이지’의 김세홍 셰프나 샌프란시스코 ‘모수’의 안성재 셰프는 현지 언론에서 한식이나 한국 식자재를 다루는 사례가 늘어나고 한식 요소를 요리에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의 불고기 광고를 뉴욕타임스에 게재하며, 그렇게라도 ‘한식은 이것이다’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고자 악착같았던 때가 불과 2년 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최근 이러한 변화는 한식의 세계화에 단비 같은 기류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한식이다’라는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것도 한식이다’라는 도약의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식이 ‘글로벌 다이닝’ 이란 걸음마를 시작한 것이다.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식 다이닝을 들여다보면 더욱 재미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시간과 자연과 사람의 ‘손’만으로 한국 전통 음식들을 만들어 온 아르티장들의 맛(食)이 셰프들의 창의적인 표현력(式)과 만나 새로운 한식의 시대를 열고 있다. 지방 곳곳의 식재료 발굴은 물론 한식의 맛의 근간을 이루는 ‘깊은 맛’을 찾아 세월을 거슬러 배우거나 세월이 담긴 맛을 접목해 간다. 이른바 한국의 오래된 맛을 품은 새로운 한식이라고나 할까.
최근 한식의 현주소를 가늠하게 하는 레스토랑 ‘밍글스’의 강민구 셰프는 일찍이 강원도에서 채소 발효 식품을 만드는 박광희 장인의 장아찌를 요리에 활용하고 있다. 박광희 장인의 장아찌는 씹을수록 산미와 단맛, 재료의 맛이 우러나며 깊은 맛을 낸다. 강 셰프의 대표적인 요리인 전복죽은 전복죽 위에 숯불에 구운 전복과 채소 발효 소스를 더해 완성하는데, 여기에 매실 장아찌를 올리면 아삭하고 매콤하면서도 새콤달콤한 맛까지 가미되어 맛의 정점을 찍는다. 스테이크 소스나 생선 소스를 만들 때에도 천연 단맛과 산미를 가미하기 위해 장아찌 국물을 사용한다. 강 셰프는 “익숙해 보이는 음식 안에서 새로운 맛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거나, 전혀 새로운 형태지만 막상 맛보면 익숙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밍글스가 전통을 접목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한식에 대한 새로운 도전은 비단 모던 코리언 레스토랑이나 파인 다이닝에만 그치지 않는다. 21세기의 한국 술집을 표방하며 전통주 페어링에 대한 색다른 제안으로 장안의 화제가 된 ‘안씨 막걸리’의 김봉수 셰프는 틈만 나면 ‘지리산의 장 선생님’으로 불리는 고은정 씨를 찾아가 장 담그기를 배운다. 우리 장 아카데미 원장, 약선식생활연구센터 소장 등을 겸하고 있는 장 담그기 고수에게서 이제 막 무림에 나온 젊은 셰프에게 비법이 전수되고 있는 셈이다.
전통 한식을 기반으로 하는 한식 레스토랑 ‘다담’의 경우, 20여 년간 궁중 음식과 반가 음식을 요리해 온 정재덕 셰프가 주방을 총괄하는데, 대안 스님을 사사한 사찰 음식이 그의 손에서 새롭게 재탄생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금수암 주지스님이기도 한 대안 스님은 지리산에서 직접 채집한 각종 산야초로 효소액을 담그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은 채소 발효의 스펙트럼이 무궁무진한데 채소를 이용해 음식이 아닌 천연 조미료 역할을 하는 발효음식이 바로 효소액이라 할 수 있다. 정재덕 세프는 이런 산야초 발효액을 장뇌삼과 함께 식전주처럼 즐길 수 있도록 곁들여 내거나 메밀 막국수와 같이 비빔장을 만들 때 2, 3스푼을 넣어 몸에 좋고 감칠맛 나는 소스를 만든다
올해 서울 청담동에 혜성처럼 나타나 주목받고 있는 한식당 ‘주옥’도 예외가 아니다. 식전 음료로 본인이 직접 만든 식초음료를 내놓을 만큼 식초에 관심이 많은 신창호 셰프는 최근 국내 최초의 식초 명인인 한상준 씨의 오곡초를 경험하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직도 만든 식초의 절반 이상을 버려 가며 좋은 식초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중에 만난 장인의 식초는 강한 산미와 더불어 감칠맛이 났어요. 다른 부재료가 필요 없는 만능 소스 같다고나 할까요”
이런 시도가 어느 때보다 활발한 지금,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27일시작해 10월 1일까지 열리는 있는 2016 월드 한식 페스티벌이 그것. 매년 가을이 되면 세계 곳곳에서 화려한 음식축제 소식들이 넘실거린다. 진작부터 해외에서는 자국의 요리를 하나의 문화로 즐기는 축제들이 내용면에서나 규모면에서나 다양하게 발전해 왔지만, 국내에서는 해외 미식을 중심으로 하는 글로벌 푸드 축제들이 먼저 자리를 잡는 듯한 기류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번 한식 페스티벌은 ‘한식, 미래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서울 곳곳의 50개 레스토랑에서 특별한 한식 메뉴를 선보이고 포럼, 전시회, 토크 콘서트 등의 문화 행사가 곁들여진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바로 갈라 디너다. 이번 갈라 디너는 한식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5명의 장인과 한식을 표현하고 있는 5명의 셰프의 컬래버레이션 디너로 구성됐다. 밍글스의 강민구 셰프, 안씨 막걸리의 김봉수 셰프, 다담의 정재덕 세프, 스와니예의 이준 셰프, 주옥의 신창호 셰프가 각각 채소 발효의 박광희 씨, 곡물 발효의 고은정 씨, 산야초 발효액의 대안 스님, 곡물 발효의 윤왕순 씨, 식초 발효의 한상준 씨와 컬래버레이션 디너를 선보이는 것이다. 대개 유명한 두 셰프와의 협업이 대부분이던 기존 컬래버레이션에서 벗어나 장인과 셰프의 협업 디너라는 점에서 참여한 셰프들은 매우 어려웠지만 매우 좋은 계기였다고 고백한다. 3주간 파트너인 장인과 다양한 장을 테이스팅하고 함께 메뉴를 짠 김봉수 셰프는 “고민을 거듭하면서 한식을 더욱 깊게 이해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고 소감을 밝혔으며, 박광희 씨 또한 “최근 젊은 셰프들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장아찌를 다양한 형태로 경험하고 있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아직은 낯설고 서툴 수도 있겠지만, 한식(食) 한식(式) 조화와 다양성을, 익숙하다고 생각해 온 한식의 새로운 가치와 확장 가능성을 알아 가는 여정이 조금씩 진행 중이다. 아직은 미완성인, 즉 완성될 모습이 무궁무진한 한식의 내일을 찾아가는 여정.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시행착오 역시 미래 한식을 위한 자양분이 되어줄 거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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