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뱅크보스턴모기지 사의 고객 카밀레비치 씨는 우편물 한 통을 받았다. 고객들이 이 회사를 상대로 낸 집단소송이 화해로 끝나, 그에게도 보상금 2달러가 지급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소송을 낸 일이 없는 그로서는 영문을 모르는 일이었다(본인이 소송을 안 냈어도 피해 내용이 같으면 덩달아 원고가 되는 게 집단소송이다). 하지만 그를 더 황당하게 만든 구절은 뒷부분에 씌어 있었다. ‘변호사 비용으로 91달러를 낼 것.’ 카밀레비치 씨뿐이 아니었다. 원고, 즉 뱅크보스턴모기지 사의 고객 30만 명이 비슷한 통보를 받았다. 이들에게서 나온 850만 달러는 원고 측 변호사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크레용에 유해 석면이 들어 있는지가 쟁점이던 ‘슈왑 대 비니&스미스 사’ 소송이 화해로 끝났을 때 원고들이 손에 쥔 것은 75센트짜리 쿠폰 몇 장씩이었다. 논란을 빚은 바로 그 크레용을 살 수 있는 쿠폰이었다. 원고 측 변호사는 60만 달러를 챙겼다.
집단소송으로 피해자는 쿠폰 쪼가리나 손에 쥐고 변호사는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는 것은 미국에서는 흔하디흔한 일이다. ‘쿠폰 화해’라는 말이 보통명사처럼 쓰일 정도다. 미국 변호사들이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다. 피해자가 수만∼수십만 명에 이르고, 전체 피해액은 크지만 개별 피해액은 미미하며, 내용이 복잡하고 전문적인 집단소송은 애초부터 ‘변호사에 의한, 변호사를 위한’ 소송이 될 싹을 갖고 있다.
물론 집단소송이 소비자 피해를 줄이고 주가조작을 없애는 데 기여한 측면도 많다. 하지만 미국에서조차 부작용이 심해 1995년 소송 요건을 대폭 강화하고도 추가 개선 논의가 한창이다. 이런 제도를 무턱대고 도입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집단소송제 확대 여부는 증권 분야의 시행 결과를 충분히 지켜본 뒤 논의해도 결코 늦지 않다.
정작 서두를 일은 증권집단소송법 개정이다. 법 시행 전에 이뤄진 분식회계에 대해서도 집단소송을 낼 수 있도록 한 조항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
경영투명성이 훨씬 높은 미국에서도 기업을 망하게까지 할 수 있는 게 집단소송이다. ㈜대우 14조 원, 하이닉스반도체 1조9000억 원, 현대상선 1조4000억 원, SK글로벌 1조9000억 원 등 대규모 분식회계 사례로 볼 때 국내 대기업의 과거를 집단소송으로 응징한다면 어느 기업이 언제 망할지 모른다. 자기 손으로 10명도 못 먹여 살리는 국회의원들이 기업 과거사까지 바로 세운답시고 수만 명의 밥그릇을 걷어차는 일은 없어야 한다.
천광암 논설위원 ia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