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④]실권없이 표류한 「대통령직 인수위」

  • 입력 1998년 1월 7일 20시 44분


문민정부 탄생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고 있던 93년 1월4일. 서울 여의도 뉴서울빌딩에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첫 회의가 열렸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당선자의 움직임에 따라 보도진도 물결처럼 몰렸다.

이날 첫 회의에서 김당선자는 정원식(鄭元植)인수위원장을 비롯한 15명의 인수위원들에게 먼저 ‘입조심’을 당부했다. “인수위는 특히 인사에 관한 잡음이 나지 않도록 조심해달라. 누구든 인사추천의 권한은 있으나 반드시 본인과 깊은 의논이 있기를 바란다.”

김당선자의 당부는 사실 별로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동숭동팀’의 전병민(田炳旼)씨에게 인사실무를 맡겨놓은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인수위는 인사관련 자료를 구할 수도 없었다.

상도동 출신으로 당시 인수위 행정실장을 맡았던 한나라당 김무성(金武星)의원의 증언. “인수위는 인사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또 6공 청와대로부터 인사자료를 인수받은 것도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가 인수위 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이른바 ‘존안(存安)자료’를 모두 파기한 상태였습니다.”

5년 후인 98년 1월5일 김영삼정부가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의 인수위에 정부내 1급 이상 공직자 인사자료를 포함해 청와대가 보관중인 ‘존안자료’ 일체를 넘겨준 것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존안자료’는 대상인물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으며 그 자료를 누가 작성했는지 알 수 있게 돼 있다. 따라서 당시만 해도 자료를 폐기, ‘후환’을 없애는 게 관행이었다. 그렇다고 인수위가 김당선자의 인사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 인수위 차원은 아니었지만….

당시 인수위 관계자의 증언. “인수위 내에 있던 김당선자의 차남 현철(賢哲)씨 인맥이 은밀하게 인사실무작업에 관여했습니다. 예컨대 ‘김소장(김현철)’이 이회창(李會昌)전중앙선관위원장, 김진우(金鎭佑)당시 헌법재판소 재판관, 배명인(裵命仁)전안기부장 등 4명의 명단을 주며 ‘감사원장 후보들인데 스크린을 해달라’는 식으로 작업을 맡겼습니다. 김소장은 스크린을 맡기면서 ‘이게 새어 나가면 이 흘린 것으로 알겠다’고 못박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김소장은 아마 김당선자에게서 조각(組閣) 대상자들을 귀띔받고 나름대로 움직인 것 같습니다.”

인수위 내 ‘현철 인맥’은 또 김당선자에게 사적으로 보관하고 있던 2만명 가량의 방대한 ‘인물파일’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출처는 안기부였던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 인물파일에는 공직자는 물론 교수 경제인까지 망라돼 있었다는 겁니다. 예컨대 박희태(朴熺太)법무장관의 경우 딸의 이중국적 및 대학 편법입학문제로 장관직을 사퇴하긴 했지만 박장관의 인물파일에 이미 이중국적문제는 정확히 기재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당선자는 그 파일을 전혀 이용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인수위 관계자의 말이다.

인수위의 기능은 이렇게 점차 축소돼 갔다. 사실 김당선자 자신이 인수위에 그다지 ‘무게’를 싣지 않았다.

문민개혁 프로그램을 마련한 전씨의 ‘동숭동팀’과 선거 당시 민자당 대선기획위원회와별도의 ‘사조직기획위원회’에깊이관여했던 한완상(韓完相)교수등은인수위를 ‘개혁위원회’로 만들자고 했다. 김당선자의 생각은 달랐다.

상도동 사람의 증언. “YS는 자신이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를 받아 당선됐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전씨는 주돈식(朱燉植)조선일보논설위원 등 동숭동팀을 인수위에 참여시키려고 했지만 김당선자는 이를 일축했습니다. 대신 자신이 전국적 지지를 받았다는 모습을 강조하는 정치색이 강한 인수위를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15명의 인수위원들은 거의 철저하게 지역대표성을 띤 정치인들이었다.

정원식위원장과 87년 노태우(盧泰愚)대통령 취임준비위에 참여했던 최병렬(崔秉烈)의원, 최창윤(崔昌潤)비서실장을 제외하고는 전부 그랬다. 남재희(南載熙·서울) 박관용(朴寬用·부산) 김한규(金漢圭·대구) 서정화(徐廷華·인천) 이환의(李桓儀·광주) 이재환(李在奐·대전) 이해구(李海龜·경기) 이민섭(李敏燮·강원) 신경식(辛卿植·충북) 양창식(梁昶植·전북) 유경현(柳瓊賢·전남) 장영철(張永喆·경북)인수위원 등.

전국 유권자들을 향한 일종의 ‘당선사례’ 성격이었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출발한 인수위가 결국 표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에는 정권인수위에 대한 김당선자의 이같은 ‘이해부족’도 빼놓을 수 없다.

민자당 지도부의 견제도 한몫을 했다. 인수위가 당보다 우위에 서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김무성 당시 인수위 행정실장의 회고. “사실 정권인수작업은 두달이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당에서 견제가 심했습니다. 김종필(金鍾泌)대표 등 지도부는 노골적으로 당우위를 주장하며 인수위 활동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당선자가 인수위에 머물면서 정권인수에 전념하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첫 회의 다음날인 1월5일 정원식위원장이 김종필대표를 방문, “인수위는 행정부 업무현황 파악과 취임식 준비임무만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당의 견제를 의식, 스스로 선을 그은 셈이다.

부정방지위원회를 둘러싼 논란도 인수위와 당의 관계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

인수위는 93년 1월 활동개시와 함께 김영삼후보의 대선공약이었던 부정방지위 구성작업에 착수했다. 김후보의 공약은 청와대 사정수석실을 폐지하고 부정방지위를 대통령 직속으로 신설, ‘윗물맑기운동’을 펼쳐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인수위 관계자의 증언. “인수위에서 논의된 부정방지위안은 한마디로 검찰 경찰 등 사정(司正)기관에 대한 사정기관을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 직속의 부정방지위원회가 정점이 되고 감사원은 외부 사정, 국무총리행정조정실은 내각 자율 사정, 검찰은 범죄수사기능으로 각각 특화해 강력한 사정을 펼쳐나간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특히 감사원을 비롯한 사정기관의 자체정화가 전제돼야 한다는 게 인수위의 생각이었습니다.”

‘사정(司正)기관에 대한 사정’은 인수위뿐만 아니라 김당선자를 비롯해 당시 민주계 일반에 퍼져있던 불신의 산물이었다.

김무성의원의 기억. “92년 6월인가 김대통령이 민자당후보로 선출된 직후 김영준(金永駿)감사원장이 민자당사에 찾아 왔습니다. 각 부처 장관들이 후보에게 인사차 당사를 방문하던 때였습니다. 당사 6층 대표실 앞에서 기다리던 김원장에게 내가 ‘정부내에 부정부패가 심각한데 부정부패를 감사해야 할 감사원까지 부패해 있다는 얘기가 많다’고 하자 김원장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문민정부 최고사정기관’으로 추진되던 부정방지위는 그러나 대통령 직속도 아닌 감사원장 직속의 ‘자문기구’로 격하되고 말았다.

당에서 ‘국가사정기관의 옥상옥(屋上屋)이 될 우려가 높다’는 반대론이 제기됐기 때문이었다. 민자당의 배후에 검찰 경찰 등 기존 사정기관들의 ‘로비’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김당선자는 93년 2월11일 부정방지위 설치안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부정방지위가 기존 사정기관의 지휘체계를 흔들 우려가 있다”며 민자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당선자의 흉중(胸中)에는 이때 이미 ‘감사원 강화’라는 카드가 자리잡고 있었다. 김당선자는 이날 인수위 대변인을 맡고 있던 신경식의원에게 “앞으로 감사원이 중요한 일을 하게 될 것이다”라며 흉중의 일단을 드러냈다. 신대변인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라고 물었다. 김당선자는 사뭇 심각한 어조로 “안기부에서 갖고 있던 감사기능을 감사원에 주면 된다”고 대답했다.

민주계 핵심인사의 증언. “김당선자는 당시까지만 해도 안기부가 갖고 있던 정부부처에 대한 보안감사권을 감사원에 넘겨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안기부 보안감사는 사실상 모든 정부기관에 대한 직무감사는 물론 비위감사권으로 악용돼온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김당선자는 그러니까 무소불위로 악용돼온 안기부의 보안감사권을 없앰으로써 ‘안기부의 문민화’도 노리고 감사원 강화도 도모하는 패키지카드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김당선자가 인수위의 부정방지위안을 ‘옥상옥’이라고 경계하면서도 “취임 첫날부터 강력한 사정(司正)의지를 보이고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용납하지 않겠으며 먼저 고위사정기관 자체에 대한 사정부터 해나가겠다”고 선언한 배경엔 이런 패키지카드가 있었다.

이때쯤 인수위의 모습에서 ‘권부(權府)’의 이미지는 이미 탈색되고 있었다. 인수위는 총무처와 함께 취임식 준비작업과 ‘효자 프로젝트’작성에 매달렸다. ‘효자 프로젝트’는 김당선자 취임후 1백일 동안의 ‘문민일정’을 구체적으로 정리한 일정표. 인왕산개방, 경복궁 30경비단 이전, 안가 철거 등의 ‘문민 아이디어’를 대통령 일정속에 끼워넣어 새 정부의 이미지를 극대화한다는 프로젝트였다.

인수위 주변에 몰려들었던 그랜저승용차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김창혁기자>

▼ 노태우씨가 「대통령직 인수위」로 명칭 고집 ▼

지금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이 정권인수기구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92년 12월30일 김영삼(金泳三)대통령당선자의 정권인수 때 처음 등장한 이름이다.

14대 대선에서 승리한 김영삼당선자 진영이 그 당시 노태우(盧泰愚)정부에 당초 요구한 명칭은 ‘정권 인수위’였다. 물론 ‘정권을 쟁취했다’는 의미였다.

또 노태우전대통령이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의 ‘서슬’에 눌려 ‘정권인수’라는 말을 못쓰고 ‘취임준비위원회’에 자족(自足)해야 했던 과거사와 차별한다는 뜻도 담겨있었던 것.

그러나 노태우정부측은 “정권인수는 혁명적인 상황에서 있는 일로 법적 문제가 있다”고 버텼다는 후문이다. 결국 절충 끝에 ‘인수’라는 표현을 살리는 선에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됐다.

과거 5.16쿠데타 직후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의 국가재건최고회의, 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전두환전대통령의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권력이동 시기에 있었지만 인수위와는 차원이 다른 기구들이었다.

<김창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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