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⑫]YS 『박철언의원 비리를 캐라』

  • 입력 1998년 2월 3일 20시 28분


93년 3월말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청와대 집무실. 김대통령의 은밀한 부름을 받고 달려온 이충범(李忠範)청와대 사정1비서관이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통령이 수석비서관도 모르게 이비서관을 직접 부른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김대통령은 취임 후 기회있을 때마다 성역없는 부정부패 척결을 강조해왔다. 취임 한달이 지나도록 재산공개과정에서 문제가 된 일부 정치인의 의원직 사퇴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자 김대통령은 사정을 독려하고 있던 때였다. 이비서관이 긴장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각하, 부르셨습니까. 무슨 하명(下命)하실 일이라도….”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김대통령이 말문을 열었다. “이비서관, 박철언(朴哲彦)씨의 범법사실을 한번 찾아보세요.” 김대통령의 목소리에는 당시 국민당 박철언의원(현 자민련 부총재)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이 진하게 배어있었다. ▼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비서관의 뇌리에는 순간 90년 3당 합당 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박의원이 내각제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김대통령과 계속 마찰을 빚었던 일이 그것이었다. 이비서관은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의 중학교 선배. 그는 김대통령이 민자당 대표였던 시절부터 ‘상도동’에 드나들면서 김대통령과 인연을 맺어 친숙한 사이였다. 92년 대통령 선거 때는 ‘영 소사이어티’라는 사조직을 만들어 김대통령을 도왔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문민정부 출범 직후 공무원의 인사 관련 자료수집과 사정기획 등을 담당하는 사정1비서관에 발탁됐다.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이비서관은 곧바로 김덕(金悳)안기부장을 찾아가 박의원 관련 자료협조를 요청했다. 김안기부장(현 한나라당 의원)의 설명. “이비서관이 박의원 관련자료를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았습니다. 박의원을 이런 식으로 수사하면 확증이 없는 한 정치보복의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이비서관에게 설명했어요.” 결국 이비서관은 안기부 고위간부들을 통해 박의원 관련 파일을 확보했다. 파일에는 박의원의 사조직인 월계수회의 자금흐름과 계좌번호 등이 기록된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 이비서관은 고교선배인 서울지검 조모부장검사(현재 변호사 개업)를 은밀히 만나 ‘각하의 뜻’이라며 문제의 자료를 넘겨주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조변호사는 “검찰 지휘계통을 통해 박의원에 대한 수사지시와 자료를 받았다”고 엇갈린 주장을 했다. 조변호사의 설명. “넘겨받은 자료는 방대했지만 수사를 위한 자료나 정보로서의 가치는 별로 없었습니다. 계좌추적을 해본 결과 박의원이 (기업 등과) 돈을 주고 받은 내용이 일부 나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정치자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 정도로는 박의원을 처벌할 수 없다고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 『표적사정 못합니다』 버텨 당시 박의원 수사를 둘러싼 조부장검사와 김모검사간의 일화 한토막. 조부장은 검찰내 계좌추적 전문가인 김검사에게 안기부 자료를 넘겨주었다. 수사여부를 검토하라는 지시도 곁들였다. 그러나 김검사는 안기부 자료에 의한 ‘표적사정’은 할 수 없다고 버텼다. “수사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박의원의 비리가 나오면 어쩔 수 없지만 처음부터 누구를 겨냥해 수사하는 것은 명분이 없습니다. 이런 수사는 안하는게 좋겠습니다.” 조부장은 이틀 동안 김검사와 실랑이를 벌였지만 김검사가 소신을 굽히지 않자 결국 이비서관의 고교 동기인 또다른 김모검사에게 수사를 맡겼다. 박의원의 비리를 찾기 위한 암호명 ‘LP(Little Prince)수사’는 일단 이렇게 시작됐다. LP는 6공 시절 박의원이 ‘황태자’로 불린데서 착안한 것.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수사는 주임검사가 수사 도중에 미국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양모검사(현재 변호사 개업)가 대신 떠맡게 됐다. 양변호사의 기억. “안기부 자료에 나온 월계수회 관련계좌는 모두 60여개였어요. 금액은 2백수십억원이었구요. 모두 현찰로 입출금됐고 대부분 일회성 가명계좌였습니다. 계좌추적을 의식한 것이죠. 박의원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계좌는 10여개 정도였어요. 가족 명의로 된 계좌도 몇개 나왔지만 규모는 1천만원 단위였습니다. 박의원을 조사하기에는 너무 액수가 적었어요. 중견그룹인 S그룹 자금의 일부가 박의원쪽에 흘러들어간 것도 확인됐지만 빌린 것으로 돼 있더군요. 조심한 흔적이 역력했어요. 당시 은행지점장 2명과 대기업 회장 3명도 극비리에 불러 조사했습니다.” 당시 수사팀은 박의원의 비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월계수회 사무국장의 개인비리를 찾아냈다. 대학설립과 관련해 억대의 돈을 받은 혐의가 포착된 것. 그러나 문제의 사무국장은 당시 거의 식물인간 상태였다. 파킨슨씨 병으로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 담배도 부인이 입에 물려줘야 겨우 피울 정도였다. 병 때문에 사무국장은 사법처리를 면했다. 박의원을 향해 김대통령이 날린 최초의 화살은 일단 이렇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박의원은 4월 중순부터 시작된 슬롯머신비리사건 수사과정에서 비리가 드러나 결국 교도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박의원이 구속된 뒤에도 그에 대한 수사는 계속됐다. 당시 서울지검 고위간부의 기억. “슬롯머신 사건으로 구속된 박의원이 뚜렷한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잡아 넣었다고 주장하는데다 수뢰액수도 적다는 지적이 있어 추가비리를 찾기 위해 안기부 자료 등을 이용한 LP수사는 계속됐습니다.” ▼ 통치기반강화 보고서 작성 양변호사의 설명도 이를 뒷받침한다. “LP수사는 그해 말까지 10개월 가량 계속됐습니다. 수사기록이 캐비닛 2개를 가득 채울 정도였으니까요. 결국 범죄혐의가 있는 박의원 관련계좌를 찾아내지는 못하고 월계수 회원인 나창주(羅昌柱)전의원을 구속하는 선에서 특명수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안기부 자료에 박의원을 구속하기에 충분한 내용이 없었던 것도 이유지만 검찰 상부의 수사의지도 확고하지는 않았습니다.” 박의원이 김대통령의 ‘손 볼 대상’1호였다면 나머지는 누구였을까. 김영삼정부 출범 후 청와대비서실에 근무했던 S씨의 설명. “정부출범 직전 나는 이른바 ‘향후 통치기반 강화방안’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민주계 핵심인사가 ‘어른(김대통령 지칭)이 관심이 많다’며 만들어보라고 했기 때문이죠. 쉽게 말해서 김영삼 정권 초기에 ‘손 볼 사람 리스트’를 만든 겁니다.” 박의원 이외에 박태준(朴泰俊·현 자민련총재)전 민자당 최고위원, 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명예회장)전 국민당 대표, 심지어 조순(趙淳)한국은행 총재도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처리방향으로는 △박의원은 사조직 자금 △박태준씨는 세무조사 △정주영씨는 현대중공업 비자금사건으로 불구속기소 △조순총재는 사퇴로 제거한다는 것이었다고 S씨는 말했다. 문민정부 출범 후 공교롭게도 박철언씨는 사조직인 월계수회 자금을 집중 추적당했다. 박태준씨도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검찰수사를 받아야 했다. 정주영씨는 검찰에서 조사받은 뒤 불구속기소됐고 조순씨는 한은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조순씨의 경우 대선전 ‘한국은행 3천억원 발권설’을 주장했던 정주영 당시 국민당대표를 검찰에 고발했다가 민자당과 사전협의도 없이 고소를 취하한 것이 주된 경질배경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면 김대통령 사정의 다른 면모를 보자. 93년 4월 하순경. 당시는 김대통령이 검찰의 성역없는 사정을 누차 독려하던 시기였다. 서울지검 특수1부는 은밀한 제보를 단서로 럭키금성그룹(현 LG그룹) 계열사인 럭키개발 비리사건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과정에서 럭키개발 간부가 관급공사를 따내기 위해 석유개발공사 도로공사 등 공사발주기관에 거액의 뇌물을 준 혐의가 포착됐다. 검찰이 럭키개발의 비자금 장부를 토대로 정치권과 관계의 유착 쪽으로 수사를 확대하려는데 청와대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검찰은 럭키개발 부회장을 구속하는 선에서 서둘러 수사를 끝내고 말았다.‘국영기업체비리척결수사’가 ‘재개발아파트비리수사’로 축소된것. ‘용’을 그리려다 ‘도마뱀’을 그린 셈이었다. 당시 수사 관계자의 증언. “수사가 끝난 뒤 얼마 안돼 김대통령과 아주 잘 아는 인사가 만나자고 해서 나갔습니다. ‘김대통령이 럭키개발 수사를 보고받고 노발대발했다’고 하더군요. 김대통령이 대선 때 신세진 기업 가운데 하나라고 그 인사는 귀띔해주더군요. 그걸 모르고 수사한 것이 화근이었지요.” 박의원과 럭키개발사건은 경우에 따라 강온(强穩)을 달리했던 사정작업의 두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다. <양기대·이수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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