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3월 중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며칠 뒤로 예정된 국가기강확립회의에 관한 보고차 찾아온 김영수(金榮秀)민정수석비서관에게 취임 후 처음으로 사정방향을 지시했다.
“김수석,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어요. 특히 검찰과 경찰이 썩었다는 얘기가 들립니다. 성역없이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해요.”
대통령 집무실을 나오는 김수석의 마음은 무거웠다. 대통령의 사정의지를 뒷받침할 만한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부패방지」 보고서가 전부 ▼
김전수석의 설명.
“나뿐만 아니라 누구도 사정에 관한 아무런 준비가 없었어요. 사정의 주도세력도 없었구요. 민주계도 사정과 관련해 어떤 요구나 주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작성한 ‘부정부패 방지대책’이라는 보고서를 박관용(朴寬用)청와대 비서실장한테서 넘겨받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사정을 주도할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에 과거 정권과 깊은 인연이 있는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도 문제였다.
검사출신인 김수석은 88년 6월 안기부 제2특보(법률담당)로 ‘외도’를 시작했다. 91년 초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서동권(徐東權)안기부장 시절 안기부 1차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민자당 대표였던 김대통령과는 두세차례 정보브리핑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1년 뒤 민자당 전국구의원이 된 김수석은 당 정세분석실장으로 일하면서 김대통령과 정례적으로 만났고 신임도 얻었다.
김전수석은 당시 자신이 미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변혁기에 부정부패문제가 거론될 것이 뻔한데 사정이 시작되면 내가 어려운 입장에 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특별히 돌봐줄 사람도, 손볼 대상도 없었지만 과거 정권의 핵심인사들을 많이 알고 있어 난처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걱정했죠.”
검찰도 성역없는 사정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김대통령은 취임 후 검찰총장과 대검 중앙수사부장에 검찰내 TK(대구경북)인맥의 좌장격인 박종철(朴鍾喆) 대검차장과 정성진(鄭城鎭) 대구지검장을 기용했다.
어차피 사정의 주대상에는 5,6공 집권세력이었던 TK출신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런데 이들을 사정할 검찰총장과 대검중수부장에 TK출신을 임명한 것은 문제가 있었다. 이 인사는 정중수부장 자신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다시 김전수석의 설명을 들어본다.
“김대통령이 법무부장관이 된 김두희(金斗喜)검찰총장 후임에 박대검차장을 임명한 것은 TK를 건너뛰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고시 15회인 박대검차장을 건너뛰고 16회인 PK(부산 경남) 출신의 김도언(金道彦·현 한나라당 의원) 대전고검장을 승진시키면 비난받을 소지가 있지요.”
그러나 당시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지낸 이모변호사의 설명은 다르다. 김대통령이 검찰의 생리를 몰라 인사를 잘못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대통령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조직이 아닙니다. 인맥으로 움직이는 조직입니다. 그러나 군은 정반대지요. 군은 통수권자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집단입니다. 김대통령은 이를 거꾸로 인식해 검찰은 구인맥을 그대로 쓰고, 군은 사정없이 물갈이를 했어요. 사정과 개혁을 제대로 하려면 검찰은 치고 군은 그대로 뒀어야 했습니다.”
▼ 파일 뒤져도 단서 못찾아 ▼
93년 3월17일 김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기강확립회의가 끝난 뒤, 김수석은 김장관과 박총장에게 김대통령의 사정의지를 전달했다.
“우리(검찰)가 뼈아픈 자성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자체 정화를 하는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죽을 맛이었다. 과거의 정보파일을 뒤져보고 여기저기 비리의 단서가 될만한 것들을 찾아봤지만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서울지검에도 비상이 걸렸다. 특수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과거정권에서 고위 경제관료를 지낸 인사들을 중심으로 20명의 사정대상 리스트를 만들었다.
뚜렷한 비리단서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과거에 비리혐의가 거론됐던 사람들의 명단을 추려놓은 정도였다. 이들의 비리추적은 당연히 허탕이었다.
송종의(宋宗義·현 법제처장) 당시 서울지검장의 기억.
“김수석이 전해준 청와대 분위기로 볼 때 검찰의 위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검찰이 뭔가 하지 않으면 큰일날 것 같았어요. 검사라도 잡아넣어 자정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검사들을 독려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3월27일 차관급 공직자들의 재산공개가 이뤄졌다. 차관급 1백25명중 정성진대검중수부장 김도언대검차장 최신석(崔信錫)대검강력부장 등 검찰 고위간부 3명이 재산보유 랭킹 5위 안에 들어 있었다.
검찰을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재산이 많거나 땅투기 의혹이 제기된 검찰간부들은 해명에 진땀을 흘렸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자정이나 사정은 엄두도 못낼 형편이었다.
검찰 수뇌부는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판단은 했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는 소극적인 자세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정성진씨(현 국민대 교수)의 기억.
“재산 형성과정에 문제가 없어 내가 희생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검찰간부들이 걱정을 많이 해 재산공개에 따른 파동이 있을 것으로 생각은 했습니다. 김두희장관에게 ‘이 기회에 내부 자정팀을 만들어 나름대로 기준을 정해 최단시일내에 정리해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나를 다른 자리로 옮겨도 좋다고까지 했지요.”
그러나 김장관은 재산공개가 몰고올 파장을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재산 형성과정에 문제가 없다면 별일이야 있겠소. 당신을 믿고 중수부장을 맡겼으니 일이나 열심히 하시오.”
정중수부장을 잘 아는 김수석도 김대통령에게 적극 해명했다.
“정중수부장은 강직한 사람으로 검찰 후배들도 존경합니다. 자유당 시절 정치인인 서민호(徐珉濠)씨 사위로 홀로 된 장모가 물려준 재산입니다. 본인도 검소하게 살고 있습니다.”
▼ 재산공개뒤 일부간부 「하차」 ▼
정중수부장은 장모가 포목상과 임대업 등으로 모은 재산으로 사들인 부동산을 유산으로 물려받아졸지에 ‘거부’가 됐다. 김대통령도 처음에는 납득하는 듯했지만 재산공개 다음날인 일요일 오전 상황은 급변했다.
김대통령은 김수석을 불러 정중수부장의 재산건을 다시 거론했다.
“김수석, 재산축적 과정이 납득되지 않아요. 장모가 물려주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장모는 세금을 다 냈겠어요.”
김대통령은 완강했다. 일요일 오후 김대통령의 이런 뜻이 검찰에 전달되자 비상이 걸렸다. 정중수부장에게도 청와대의 뜻이 간접적으로 전달됐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정중수부장은 김장관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김장관은 “총장을 만나라”며 피하는 것 같았다.
박총장과 정중수부장은 검찰총장실에서 마주 앉았다. 경북고 선후배 사이이기도 한 두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박총장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허참,어떡하면 좋지”를 몇번이나 되풀이했다.
정중수부장은 숨이 막혔다.재산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벼랑으로 내모는 현실이 분했다. 장관은 자리를 피하고 총장은 조직을 생각해 달라며 사표를 종용하고…. 검찰조직에 환멸을 느꼈다. 자정을 넘기면서 정중수부장은 마음을 정리하고 새벽 2시 박총장에게 사표를 맡겼다.
이에 앞서 최신석 대검 강력부장이 사표를 냈다. 박총장도 그해 9월 취임 6개월만에 중도하차했지만 PK출신의 김도언 대검차장은 오히려 총장으로 승진했다.
정씨는 “김대통령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것은 일요일 오전 경남고 출신 외부모임에 다녀온 뒤였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 모임에서는 검찰 고위간부중에 재산이 많은 사람들의 사표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그때 검찰이 먼저 스스로 자정노력을 했더라면 두달 뒤 고검장(이건개·李健介대전고검장)구속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검찰이 자정과 사정을 미적거리는 사이에언론과집권실세들의입에서는 검찰을 비난하는 얘기들이 계속 흘러나왔다.
“역시 검찰 갖고는 (사정이)안돼.”
“검찰 간부들이 그렇게 축재를 하고서야 어떻게 구시대 인물들을 수사할 수 있겠어.”
▼ 『검사라도 구속하라』 불호령 ▼
4월이 되면서 마침내 김대통령의 심기는 위험수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김대통령은 김영수수석을 불렀다.
“검찰과 경찰이 하는 것이 없어요. 한달이 지나도록 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검찰을 포함한 법조계 비리를 찾아보세요. 장차관들도 비리가 있으면 사정을 해야 합니다.”
4월 중순 정성진씨의 후임 김태정(金泰政·현검찰총장) 대검 중수부장의 사무실.
사정 실무총책임자인 김중수부장과 중수부 1,2,3,4과장 대검연구관 함승희(咸承熙)검사가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모여 앉았다.
김중수부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뭔가 하지않으면 검사라도 잡아넣으라는게 저쪽(청와대)분위기야. 그것도 당장!”
문민검찰 사정의 첫작품인 동화은행비자금사건과 슬롯머신비리사건 수사가 시작된 것은 김중수부장의 불호령이 떨어진 바로 다음주였다.
〈양기대·이수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