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金泳三·YS)대통령의 검찰에 대한 불신의 뿌리는 무엇이었을까.
검찰 출신 원로들은 유신시절인 75년 YS의 긴급조치위반 수사를 결정적인 계기로 보고 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YS는 그해 8월 일본과 홍콩 등을 다녀온 뒤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안보가 전쟁의 공포 속에 살아야 할 단계는 아니다”며 “안보를 위해서도 민주회복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YS를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입건했다. 서울지검 공안부는 곧바로 박권흠(朴權欽)신민당 총재 비서실장 등을 소환조사한 뒤 YS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YS는 네 번이나 소환요구에 불응하다 그해 12월30일 검찰에 출두해 4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문제는 YS가 검찰소환에 응하게 된 경위. 당시 검찰 고위간부를 지낸 A변호사는 “YS가 계속 소환에 불응하자 다급해진 검찰은 YS의 학교 후배를 통해 ‘아무 일 없을 것이니 걱정말고 한번만 나오라’고 설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말을 믿고 출두한 YS는 피의자 신문조서를 받는 수모를 당하고 다음해 1월21일 불구속기소됐다.
A변호사는 “당시 YS는 ‘검찰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집단’이라며 격분했고 그후 검찰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79년 9월 서울민사지법이 YS의 신민당총재 직무정지결정을 내린 것도 YS가 검찰뿐만 아니라 법조계 전반에 대해 깊은 불신과 반감을 강화한 계기가 됐을 것으로 법조인들은 보고 있다.
<양기대·이수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