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시절 이원조(李源祚)전의원이 ‘금융계의 황태자’였다면 박철언(朴哲彦)의원은 ‘검찰의 황태자’였다.
박의원은 인척관계가 있는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업고 자신의 ‘친정’인 검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가 검찰인사에 깊이 개입하면서 인사철만 되면 그의 사무실과 집에는 줄을 대려는 검찰간부들로 붐볐다. 이들은 박의원을 만나기 위해 몇시간씩 기다리다 단 몇 분 동안 면담하고 돌아갔다. 인사 후에는 ‘감사’의 뜻을 전하러 간 고위간부들도 많았다.
박의원은 67년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 72년 부산지검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검사로서의 능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서울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업무만큼은 치밀했다”고 말했다. 수도권의 한 검사장은 “박검사는 동료들 사이에서 미제(未濟)사건이 제일 적었다”고 말했다.
박의원은 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국보위 법사위원에 발탁되면서 검찰 실무에서 손을 뗐다. 문제는 박의원이 사실상 검찰을 떠나면서도 검사의 직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는 점.
박의원은 83년부터 2년간 청와대에 근무할 때도 부원이 한사람도 없는 서울지검 특수부장직을 갖고 있었다. 또 86년에는 ‘위인설관(爲人設官)’이라는 지적 속에 신설된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에 임명돼 검찰의 ‘별’이라는 검사장이 됐다.
박의원은 88년 제13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검사직을 그만두었다. 검찰 후배들은 “검찰을 정치의 시녀로 전락시킨 책임이 있다”며 곱지 않게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