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12월말. 이건개검사는 31세의 나이에 수도 서울의 치안총수인 시경국장에 전격적으로 임명되면서 단연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이검사가 시경국장에 발탁된 것은 그의 부친인 고 이용문(李龍文)장군과 박정희(朴正熙) 당시 대통령의 각별한 관계가 배경이었다.
이장군은 박대통령이 48년 사상문제로 곤경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해주었으며 박대통령은 이장군이 세상을 떠난 이후 매년 기일(忌日)을 챙기며 추모했다.
이검사는 시경국장을 마치고 대검 중수부 1과장과 서울지검 3차장 대검 공안부장 등 요직을 거쳐 92년 서울지검장에 올랐다.
그는 92년 대선 당시 김영삼(金泳三)후보를 음양으로 지원해 김대통령의 상당한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그러나 슬롯머신업계비리사건 수사과정에서 정덕진(鄭德珍)씨 형제와의 유착관계가 드러나 구속되면서 ‘출세’에 제동이 걸렸다.
그후 5년이 흐른 지금 이의원은 자신의 구속이 ‘정권의 음모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사상이 불순한’ 김대통령 측근들이 대표적인 ‘공안통’인 자신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
이의원은 당시 자신에 대한 수사를 지휘한 검찰 수뇌부에 대해서는 “부당한 수사를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막지 못했다”며 “평생 그들에 대한 한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