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그룹 정태수(鄭泰守)총회장에게서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검청사 11층 특별조사실에서 김명곤(金明坤·현청주지검부장검사)검사와 마주앉은 홍의원은 출두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당당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홍의원은 정총회장을 알게 된 경위부터 시작해서 돈의 사용처 등을 털어놓았다.
그는 90년 3당 합당 후에 서울 이촌동의 민자당 김명윤(金命潤)고문댁에서 정총회장을 소개받아 알게 된 뒤 자주 만나면서 휴가 때나 추석 연말 등 1년에 두세차례 용돈으로 몇백만원씩 받았다고 진술했다.
당시 정치에 꿈을 두고 있던 터라 장래에 정계에 투신하면 기업가들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러던 중 홍의원은 93년 말 정총회장에게 국회의원에 출마할 뜻을 밝혔다. 정총회장은 “힘닿는 데까지 밀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당시 수사관계자의 기억.
“조사실에 들어가보니 홍의원은 처음에 분을 삭이지 못하는 듯했어요. 그는 자신이 받은 돈을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반응이었어요. 속된 말로 하면 ‘행세하는 사람치고 내돈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느냐’는 식이었지요. 당시 홍의원이 돈을 준 이른바 ‘홍인길리스트’를 불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돈 것도 그런 맥락에서일 겁니다.”
▼金전대통령 별반응 없어▼
홍의원은 결국 검찰에 출두한 다음날인 2월11일 정총회장에게서 1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홍의원의 구속을 김대통령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청와대에 근무했던 측근들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청와대에서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다)’을 신조로 칼국수만 먹고 지낸 김대통령이 수족 같은 측근의 구속에 놀라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구속은 이미 오래전에 예고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김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93년 3월 어느날 청와대 홍인길 총무수석비서관 사무실.
청와대에 들어온 뒤 하루 평균 40∼50통씩 걸려오던 외부전화가 이날따라 2백통이 넘어 홍수석은 진땀을 흘려야 했다.
김대통령과 야당시절에 이런 저런 인연을 맺은 사람이나 민주산악회 간부 등 김대통령의 당선에 자신이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김대통령과의 면담이 어려워지자 대신 홍수석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이들은 김대통령의 개혁이 잘되고 있다고 운을 뗀 뒤 이권과 관련된 청탁이나 취직부탁 생활비 지원 등 용건을 말했다. 청와대로 홍수석을 직접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홍수석은 당연히 청와대 비서실이나 정부기관에 이런 저런 부탁을 해야 했다. 정권의 ‘실세’로 통하던 홍수석의 부탁을 받은 기관들이 거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홍수석을 통하면 안되는 일이 별로 없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몰렸다. 자연스럽게 홍수석을 둘러싼 이런 저런 말들이 나돌았다.
94년 무렵 홍수석이 직접 돈을 대 출판팀을 운영할 때였다. 출판팀에서 일하던 이모씨가 골프장 인가를 받기 위해 백방으로 뛰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씨는 골프광인 홍수석에게 접근해 함께 자주 골프를 치러 다녔다. 당시 홍수석은 김대통령의 골프금지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골프를 즐기는 ‘간 큰 남자’였다. 소문이 좋지 않게 난 것은 당연한 일.
이씨는 홍수석을 등에 업고 일을 추진하면 잘될 것으로 생각했던지 불법으로 골프장 인가를 추진하다 결국 사정당국에 꼬리가 잡혔다.
청와대 사정비서관실은 이씨를 구속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홍수석은 구속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민주계 출신의 비서관이 나섰다. “이씨를 잡아넣지 않으면 형님이 비호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청와대 고위인사도 홍수석에게 “자꾸 이러다가는 쇠고랑을 찬다”고 경고했다. 결국 이씨는 구속됐다.
김대통령이 취임 후 ‘정치자금을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그의 분신같은 홍수석은 계속 뒷돈을 받았다. 챙겨야 할 데가 한 두군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김대통령을 대신해 민주계 인사들을 챙기고 각종 경조사에 돈봉투를 보내고 때로는 옛 동지들에게 용돈도 줘야 했다.
비극은 바로 거기서 싹튼 것이다.
홍수석을 잘 아는 한나라당 의원의 설명.
“홍수석은 심지어 5공 시절 민주화추진협의회를 함께했던 국민회의 등 야당인사들에게도 후원금은 물론 용돈까지 주었습니다. 홍수석은 그만큼 챙겨야 할 곳이 많았어요. 홍수석의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였으니까요. 홍수석은 기업인들에게서 돈을 받고 대신 기업인들의 청탁을 들어주는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겁니다.”
홍수석은 판공비가 부족해 고민하던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에게도 ‘해결사’같은 존재였다. 수석비서관들이 돈을 쓴 영수증을 보내면 홍수석은 기꺼이 처리해주었다.
홍수석은 자신이 이런 저런 ‘민원성’ 부탁을 자주하는 수석비서관에게는 직접 찾아가 거액을 ‘판공비’로 쓰라며 내놓기도 했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모인사의 기억. “홍수석은 가끔 내방에 들러 ‘돈 쓸데가 많을 것’이라며 봉투를 놓고 갔어요. 봉투를 열어보니 1천만원이 들어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청와대 공금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쓸데가 많아 그냥 받았습니다.”
민주계의 한 인사는 “장학로(張學魯)전청와대 1부속실장이 개인적인 축재를 했다면 홍수석은 돈을 받아 배분하는 일종의 ‘정거장 역할’을 했다”고 홍수석을 두둔했다.
그러나 민주계 다른 인사의 설명은 다르다.
“물론 홍수석이 받은 돈 대부분을 남을 위해 쓴 것은 사실일 겁니다. 그러나 홍수석이 꼭 써야 할 데에 돈을 썼는지는 의문입니다. 때론 먹고 마시면서 흥청거린 측면도 없지 않다는 말입니다.”
상도동 시절 김대통령의 집사장(執事長)이었던 홍수석은 김대통령의 정치자금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정치자금을 준 사람들에게 신세갚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동화은행 비자금사건이 단적인 예였다.
93년 4월 말 대검찰청은 92년 대선 때 김대통령의 선거자금 조성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원조(李源祚)의원의 수뢰혐의를 포착했다.
그러자 홍수석이 이의원을 구하러 나섰다.
홍수석은 서울 롯데호텔에서 이의원의 수사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는 검찰인사를 만났다.
“이의원 부분은 없던 걸로 해줄 수 없습니까. 그러면 앞으로 출세를 보장하겠습니다.”
그러나 검찰인사는 “홍수석의 말씀은 안들은 것으로 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대해 홍전의원은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각하에겐 미안한 마음뿐”▼
김대통령은 홍수석의 돈 씀씀이를 알았을까, 몰랐을까.
김대통령과 막역한 모인사의 설명.
“김대통령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는 몰라도 홍수석이 총무수석 재직중 ‘용돈’을 받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들은 것 같습니다. 몇번이나 ‘벼락’을 내렸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홍수석은 김대통령 몰래 골프치러 나갔다가 야단맞은 적도 있어요. 김대통령은 한때 홍수석을 청와대에서 내쫓으려 했다는 겁니다.”
김대통령의 이런 조치에 홍수석은 사석에서 나름대로 ‘억울함’을 호소한 적이 있다.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상도동 가신출신 인사의 기억.
“김대통령이 취임하고 2년쯤 지나서였어요. 홍수석이 술에 대취해 ‘대통령은 청교도처럼 살라지만 나는 죽을 지경이다. 상도동 사람들, 민주산악회 사람들, 그리고 대통령이 옛날에 신세진 사람들이 모두 나를 찾아오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그 사람들 관혼상제는 챙겨줘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도 어른은 날벼락만 내리니…’라며 주정아닌 주정을 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홍의원이 구속된 다음날인 97년 2월13일 변호인은 서울구치소로 홍의원을 면회갔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라는 변호인의 위로에 홍의원은 의외로 담담했다.
“내가 축재한 것이 없고 세상 분위기가 다 그런 것인데 원망할 게 뭐 있습니까. 각하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긴 여행 가는 것으로 칠랍니다.”
그의 말은 자신도 언젠가는 구속될 것을 각오하고 돈을 받아왔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졌다.
검찰 고위간부를 지낸 법조인의 회고.
“김전대통령 측근들의 비리는 패거리 정치와 가신정치의 산물입니다. 보스에 대한 충성과 의리가 앞서다보니 법과 윤리의식은 안중에도 없게 된 거죠. 일부 가신들이 결국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된 것은 이런 문제들은 그대로 놔둔 채 자신만 고고하게 살려고 한 김전대통령의 책임도 적지 않다고 봅니다.”
〈양기대·이수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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