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 24]죽었다 살아난 박태준

  • 입력 1998년 3월 8일 20시 37분


김영삼(金泳三·YS)대통령 취임을 열흘 남짓 앞둔 93년 2월13일 오전. 포항에 있는 포항제철 본사 자금부 사무실에 국세청 조사요원 15명이 들이닥쳤다.

비슷한 시간, 서울에 있는 포철사무소와 광양의 제철소에도 국세청 조사요원들이 나왔다.

전날 대구지방국세청이 발표한 포철의 정기 법인세 조사를 신호탄으로 전격적으로 실시된 포철에 대한 ‘융단폭격’은 박태준(朴泰俊·TJ·현 자민련총재)명예회장을 겨냥한 것이었다.

국세청은 “포철이 오랫동안 외부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독점적으로 기업을 운영해온 탓에 여러 문제점이 제기돼 조사에 착수하게 됐다”며 ‘정기적인 법인세 조사’라고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국세청의 조사는 포철이 외국과의 거래에서 외화자금을 유용했는지와 TJ의 개인비리에 집중됐다.

국세청은 포철 내부는 물론 포철에 원 부자재를 납품하거나 용역을 제공하는 33개 자회사와 47개 협력사까지 조사대상에 포함시켜 이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TJ체제의 포철에 비상이 걸린 것은 당연한 일.

▼ 浦鐵 새무조사 시작 ▼

당시 포철 간부의 증언.

“몇몇 임원이 청와대에 줄을 대 갑작스러운 세무조사의 배경을 알아봤어요. 그랬더니 홍인길(洪仁吉)청와대 총무수석이 부산 경남(PK)출신 국세청 고위간부에게 세무조사를 지시한 것으로 파악되더군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또 다른 포철간부의 증언.

“14대 대선 직후 YS 진영에서 ‘포철 개혁을 위한 모임’이 주선됐고 포철의 고위간부가 이 모임에 제출했던 TJ의 개인비리 자료가 ‘특수정보’라는 이름으로 국세청에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월7일 포철 본사에서 열린 포철내 TJ 측근 간부들이 참석한 대책회의에서는 “태풍이 시작된 이상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지병인 가슴속 물혹도 치료할 겸 TJ는 사흘 뒤 일본으로 떠났다. 곧 이어 황경로(黃慶老)회장과 이대공(李大公) 유상부(柳常夫)부사장 등 TJ 측근 고위 임원 7명도 사표를 냈다.

당시 포철 이사대우 조용경(趙庸耿·현 자민련 총재비서실차장)씨의 증언.

“황회장 등이 사퇴한 뒤 장중웅(張重雄·현 포스코 경영연구소 선임연구원)상무가 나를 찾았습니다. 장상무는 당시 갓 부임한 조말수(趙末守·현 포스틸 상임고문)사장과 함께 포철의 ‘혁명군’으로 불리고 있었죠. 장상무는 나에게 ‘2년 정도 해외에 나가 공부나 하고 오라’고 했어요. 그러겠다고 했더니 조건이 있다는 거예요. 머리 속에서 TJ를 완전히 지우라는 것이었죠. 일본으로 떠난 TJ를 만나지 말라는 주문도 있었습니다.”

조씨는 그러나 “지운다고 지워지느냐”며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3월27일과 4월5일 두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TJ를 만나고 돌아왔다.

다시 조씨의 증언.

“내가 일본에 다녀온 사실을 알고 장상무가 다시 부르더니 ‘당신 똑똑한줄 알았더니 미련하구먼. 청와대에서 당신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보고 있어’라는 거예요. 장상무는 ‘회사의 입장이 어렵게 됐으니 사표를 내라. 사회정의를 위해 포철을 개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장전상무는 “조씨를 아끼는 마음에서 개인적인 판단으로 유학을 권유하고 TJ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세무조사가 전격적으로 시작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근무했던 민주계 핵심인사의 설명.

“민주계 핵심부에서는 TJ가 공기업인 포철을 개인 왕국처럼 운영한 만큼 이것을 깨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TJ가 일본에 체류하면서 궁핍하게 산다는 것을 언론에 흘려 김대통령이 핍박하는 것처럼 선전하는 것도 괘씸하게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TJ가 언젠가는 5,6공 세력과 손잡고 반격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싹을 잘라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TJ의 부정을 국민에게 알려 힘을 약화시키자는 생각에서 세무조사를 실시한 거죠.”

세무조사의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처음에 40명 안팎이던 조사요원도 3월17일에는 1백5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TJ 본인은 물론 가족 친인척 관리인, 심지어 운전사의 재산까지 샅샅이 뒤졌다.

국세청은 5월31일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TJ는 가족과 타인 명의로 2백82억원 상당의 부동산과 주식 예금을 합해 총 3백60억원의 재산을 갖고 있고 88년부터 90년까지 포철의 32개 계열사 협력업체에서 56억원을 사례비 등으로 받았다.”

TJ와 김대통령의 관계가 뒤틀린 것은 90년 3당 합당 시절.

3당 합당 후 TJ는 내각제 합의각서 파문과 연이은 당내분 사태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반 YS 민정계’의 보스로 자리잡았다.

TJ는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에게서 민정계 위탁관리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점차 이 선을 넘었다. 서울 북아현동 TJ의 집에 모여드는 민정계 의원들의 술자리에서는 ‘박태준대통령을 위하여!’라는 구호가 나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TJ에겐 돈이 있었다. 정치적 계파를 떠나 ‘박태준의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은 많지 않았다. 91년에 들어서면서 박씨의 주변은 본격적인 대권캠프로 재편되면서 YS와의 사이가 하루가 다르게 벌어졌다.

TJ는 왜 YS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그의 한 측근은 “박씨가 능력면에서 YS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게 소신이었다”고 말했다.

92년 3·24 총선을 통해 TJ는 대권을 향해 전력투구했다.

민주계 의원들에게도 선거자금을 지원했다. 총선 후에 있을 대권후보 경선을 위한 사전포석이었다.

TJ의 대권도전 시도는 노전대통령의 경선출마 포기 압력으로 물거품이 됐고 그의 처지는 급전직하했다.

국세청은 세무조사 결과를 토대로 TJ를 횡령과 수뢰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 63억원의 증여세를 추징했다.

검찰수사는 국세청 조사결과를 그대로 ‘추인’하는 형식적인 것이었다. 대검 중앙수사부는 보름 동안의 수사를 거쳐 6월16일 TJ를 횡령과 수뢰 등의 혐의로 기소중지처분했다. TJ의 심복인 황경로전회장과 유상부전부사장 등도 개인비리로 구속했다.

그러면 김대통령은 TJ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민주계 핵심인사의 설명.

“김대통령이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TJ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TJ가 국민당 정주영(鄭周永)후보를 지원한다는 얘기를 듣고 심한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포철에 근무했던 한 인사의 설명도 이를 뒷받침한다.

“대선기간에 TJ가 포철 헬기를 타고 경북 영덕에 내린 뒤 승용차로 갈아타고 강원도에 가서 정후보를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TJ가 심복들에게 정후보를 도와주라는 지시까지 했다는 거예요. 김대통령은 TJ 반대측 인사들 한테서 나중에 그런 얘기를 들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TJ측은 “정후보 지원문제를 검토한 적은 있지만 나라를 이끌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돼 검토단계에서 그만뒀다”고 해명했다.

▼ "들어와 죄값부터 치러야"▼

일본으로 피신한 TJ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돼버렸다.

그는 도쿄(東京)시내 14평짜리 아파트에서 어렵게 생활했다고 측근들은 증언했다.

당시 TJ를 만나고 돌아온 조영장(趙榮藏·현 자민련 총재비서실장)전의원의 회고.

“박회장은 비참하게 살고 있었어요. 공간이 좁아 응접실 탁자를 치우고 겨우 큰 절을 올렸는데 일어나기도 비좁았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며 회장님을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TJ에 대한 구명운동도 한때 있었다. 주돈식(朱燉植)전정무장관은 “93년 가을 TJ가 YS에게 과거사에 대한 사죄의 글을 보내 용서를 빈 일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TJ의 측근인사는 “TJ문제가 자꾸 언론에 거론되자 민주계 쪽에서 ‘TJ가 먼저 YS에게 해명성 사신(私信)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전해왔다. TJ는 한동안 거절하다가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이 미흡했던지 아무런 응답이나 조치가 없었다”고 말했다.

94년에 들어가 TJ는 김대통령측에 “귀국할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을 몇차례 전달했다. 그러나 반응은 냉랭했다. “들어와서 일단 죄값을 치르라”는 것이었다.

그해 10월8일 TJ는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귀국했다. 그는 상을 치른 뒤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가 환자복을 입고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고 불구속기소됐다.

TJ는 95년 8월 정부의 특별사면조치에 맞춰 검찰이 공소를 취소하는 바람에 문민정부 사정(司正)의 장(章)에 ‘정치보복성 표적수사’라는 말을 남기고 말았다.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한나라당 의원의 설명.

“TJ가 오늘의 포철을 일으킨 공(功)이 있는 것과 포철을 경영하면서 정치자금과 뇌물을 받은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김대통령은 사감(私感)때문에 처음에는 TJ를 개인비리로 매장했다가 나중에는 비리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해 공소를 취소했습니다. 김대통령의 무원칙한 정치보복이 결과적으로 TJ를 살린 셈이죠.”

〈양기대·이수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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