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金泳三·YS)대통령과 ‘30년 지기(知己)’인 K변호사는 청와대에서 김대통령과 대좌하자마자 따지듯 물었다.
K변호사〓김대통령, 김전의장한테 그러면 안됩니다. 도대체 무슨 부정축재를 했다는 겁니까. 구리에 있는 토평동 별장이 무슨 재산이라고…. 그 별장이야 예전에 대통령도 함께 가서 술도 마시고 하던 곳 아닙니까. 왜 취임 초부터 정치보복을 한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합니까.
김대통령〓(한참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아니야, 재산이 1천억원이 넘는다는 보고야….
K변호사〓아니 무슨 1천억원이나 갖고 있다고 그럽니까. 동숭동에 있는 샘터사 건물하고 집하고 별장 하나 있는 게 다 아닙니까.
김대통령〓(묵묵부답)
김대통령과 김전의장, 그리고 K변호사는 50년대부터 함께 어울려 다닌 말 그대로 고우(故友). 특히 김전의장과 K변호사는 같은 평양 출신이었다. K변호사는 문민정부 출범 직전 김당선자에게 세번이나 ‘김재순 총리’를 건의했을 정도였다.
K변호사의 구명(救命)노력에도 불구하고 김대통령은 주돈식(朱燉植)정무수석비서관을 통해 김전의장에게 ‘정계은퇴’라는 사약(死藥)을 내렸다.
주전수석의 설명.
“김전의장은 재산을 축소해서 신고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실 김전의장이 재산신고에서 누락했다고 언론에 보도된 토평동 별장은 나도 몇 번 놀러간 일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이북 출신인 김전의장이 선산으로 마련한 산자락에 지은 집이었습니다. 청와대와 당은 논의 끝에 의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사퇴를 권유한다는 최종방침을 확정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김대통령의 전격적인 재산공개로 시작된 제1차 재산공개는 법적 뒷받침이 없이 강행됐다. 김전의장이 만약 반발이라도 하면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주수석은 3월26일 아침 김전의장을 집으로 찾아갔다.
“내 얘기를 들으면서 김전의장의 얼굴은 상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큰 목소리로 ‘공직사퇴가 거산(巨山·김대통령의 아호)의 뜻이오? 정계은퇴가 논의될 때 거산은 뭐라고 했소?’라며 김대통령의 태도가 어땠는지를 물었습니다. 흥분을 참으려 노력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만나러 온 이유가 이것뿐이오?’라고 묻고는 자리를 떴습니다.”
▼ 단번에 무너진 「30년 우정」 ▼
김전의장은 뿐만 아니라 주수석에게 “당신은 거산도 잘 알지만 나도 잘 알지 않느냐. 거산하고 나하고 누가 더 진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느냐”라며 ‘피’를 토했다.
주수석이 면담결과를 김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김대통령은 묵묵부답, 창 밖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주수석은 바로 그날 저녁 김전의장의 4남 성구(聖龜)씨를 만나 사태의 전말을 좀더 상세히 전했다.
김전의장은 마침내 28일 밤 주수석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것을 털기로 했다”는 뜻을 전했다.
사실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재산공개파동이 휘몰아치면서 민자당은 재산 때문에 문제가 된 의원들에 대한 숙정작업을 시작했지만 김전의장은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김전의장의 재산은닉의혹에 대한 언론의 문제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전의장의 경우 부인 명의의 서울 서초2동1337 1백80여평의 대지를 공개하면서 이 땅위에 지은 지하2층, 지상 5층짜리 남천빌딩(시가 10억원)을 재산목록에서 제외시키는 대신….” “민자당 김재순의원이 동해안과 경기 하남에 있는 호화별장 3채를 숨겼으며 동해안 별장의 건축허가를 받기 위해 부인을 위장전입까지 시킨 것으로 드러났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당시 민자당 재산공개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권해옥(權海玉)전의원의 설명.
“사실 진상조사위가 국세청의 협조를 받아 조사하긴 했지만 언론이 국회의원들의 은닉재산을 추적보도하면 사실을 확인조사하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전의장은 당에서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청와대에서 김전의장의 의원직 사퇴서를 받으라는 메시지가 내려오긴 했지만 당에서는 반대했습니다.”
당시 청와대에서 재산공개파동의 뒤처리를 지휘한 주수석도 “위에서 하도 사퇴서를 받으라고 해 죽을 지경이다”고 토로하더라는 것이다. 권전의원의 추가설명.
“나는 민자당 경선 당시 김영삼후보 추대위원회 총무간사를 했기 때문에 김전의장이 YS를 위해 얼마나 진심으로 노력했는지 잘 안다. 사실 당내에서 YS의 자질론이 제기될 때도 김전의장은 천하의 인재를 두루 등용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고사까지 인용하며 옹호한 사람이다.
주수석의 전화가 왔을 때 당에서는 ‘김재순의장 만큼은 안된다’는 얘기를 분명히 했다. 또 무슨 부정축재 혐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전에 사놓은 강원도의 땅값이 오른것 뿐이었다. 김전의장 사퇴는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것이다. 대통령이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과 달리 김전의장의 경우 당시 민자당에서 문제삼지 않았다면 김대통령은 어디서 무슨 보고를 듣고 친구의 ‘토사구팽’을 결정했을까. 또 재산이 1천억원이나 된다는 보고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김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허물없는 친구’로 지내온 K변호사는 한마디로 ‘권력싸움의 결과’였다고 단언했다.
대선때 김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어느 누구보다 역할을 많이 한 김전의장을 미리 제거하기 위해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의 ‘사조직’에서 과대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김전의장도 후일 K변호사에게 “젊은 아이들의 모함”이라고 술회했다.
당시 상황을 지켜본 민주계의 한 소장인사는 “안기부에서 별도 보고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YS와 김전의장은 자유당 시절 야당인 민주당의 청년정치인으로 대폿잔을 함께 기울이던 동지였다. 5·16쿠데타 이후 두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90년 3당 합당으로 다시 한 식구가 됐다. 김전의장이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의 ‘비위’를 거스르면서까지 ‘YS 지지’를 천명한 뒤안에는 그런 우정의 세월이 있었다.
김전의장은 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을 앞두고 전국 곳곳을 돌며 YS 지원유세를 아끼지 않았다.
“사기(史記)에 나오는 한고조 유방의 예를 생각해보자. 유방이 천하통일을 이룬 것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썼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유방은 정략과 권모술수에 있어 장량(張良)에 미치지 못했고, 용병에 있어서는 한신(韓信)보다 못했고, 행정수완에 있어서는 소하(蕭何)를 따를 수 없었지만 장량 한신 소하를 다 쓸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유방 아닌가.”
K변호사나 주수석, 권전의원이 김전의장의 ‘팽(烹)’에 대해 괴로워하면서 ‘유구무언(有口無言)의 저항감’을 느낀 것도 바로 김전의장과 YS의 그런 관계 때문이었다.
▼ 『조금만 더 참지 그랬소 ▼
YS도 미안했던 것일까. 그는 김전의장이 정계은퇴를 선언한 다음날 직접 전화를 걸어 “조금만 더 참지 그랬느냐”고 말했다.
김전의장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거산이 잘 알 것 아니요. 거산이 나를 알고 내가 거산을 알 지 않소. 그런 소리는 이제 그만하시오”라고 되받았다.
토사구팽 이후 7개월 가량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지내다 귀국한 김전의장은 94년 3월 서울대 총동창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한달 반쯤 지나서 서울대 총동창회장 자격으로 김대통령과 오찬회동을 가졌다. ‘팽’당한 지 1년2개월 만이었다.
김전의장은 회동 후 기자들이 “인간적인 화해의 뜻이 담긴 오찬이었느냐”고 묻자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인간적인 관계복원으로 해석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사실 김대통령은 김전의장이 정계를 떠난 뒤 여러차례 만날 기회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김전의장은 한사코 피했다.
K변호사의 회고.
“김전의장이 정계를 떠난 뒤에도 김대통령에게 여러차례 얘기했습니다. 15대 총선 직전에는 대통령에게 ‘김전의장한테 전국구 후보를 줍시다’라고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도 흔쾌히 응낙하고 김전의장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김전의장은 김대통령에게 “나를 두 번 죽이려는 것이냐”며 전국구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김대통령은 김전의장이 계속 고사하자 96년 2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참석차 동남아를 순방한 뒤 귀국, 다시 K변호사에게 “빨리 연락해보라”며 김전의장과의 만남을 서둘렀다.
김전의장은 그러나 K변호사에게 “형님, 거산을 만나면 또 전국구 얘기를 할텐데 형님이 안만나도 되도록 잘 말해주십시오”라며 피했다.
김전의장은 언젠가 “내가 죽을 때 갖고 갈 재산이 있다면 첫째는 친구고, 둘째는 책, 셋째가 내면세계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전의장은 퇴임한 YS를 향한 ‘응어리’가 풀렸느냐는 물음에 직답을 피했다. 다만 “한 순간이 아까운 인생인데 (내가 가슴에 응어리를 계속 묻고 있으면)그 사람에게 인생을 지배당하는 것 아니냐”며 여운을 남겼다.
〈김창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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