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권영해(權寧海)국방부장관이 율곡사업 감사와 관련해 출국금지조치 됐다는 언론보도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수석비서관의 보고를 받은 김대통령의 얼굴이 순간 심하게 일그러졌다. 곧이어 김대통령의 분노가 터져나왔다.
“언론의 허위보도 때문에 피해가 여간 심하지 않아요. 이번에 단단히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중앙일보에 대해 조치를 취하세요. 해당기자는 물론 사회부장 편집국장도 구속하도록 하시오.”
김대통령의 ‘추상같은’ 지시를 전달받은 서울지검에는 비상이 걸렸다. 검찰의 판단으로는 오보를 한 기자 외에 사회부장과 편집국장을 구속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도 김대통령은 구속을 하라고 다그치고….”
송종의(宋宗義·전법제처장)서울지검장이 할 수 없이 ‘해결사’로 나섰다. 송지검장은 검찰 안가에서 김영수(金榮秀)청와대 민정수석을 만나 수사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대책을 숙의했다. 결론은 김대통령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기회에 버릇 고쳐야』▼
김수석은 곧바로 박관용(朴寬用·현 한나라당의원)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달려갔다.
“사회부장과 편집국장을 구속하면 안된다는 게 검찰의 판단입니다. 무리하게 구속하면 후유증도 심각할 것입니다.”
결국 박비서실장이 김대통령을 설득해 6월14일 문제된 기자만 명예훼손혐의로 구속하는 선에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설명.
“김대통령은 취임 후 언론보도에 대해 불만이 많았어요. 정권을 잡기까지 언론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대통령이 된 뒤 언론의 비판적이거나 오보성 기사에 대해서는 참지 못했어요. 그러던 차에 중앙일보 오보사건이 터지자 이 기회에 언론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어떤 정치인보다 언론의 도움을 많이 받고 언론의 생리도 잘 아는 김대통령이 취임 후 언론사정(司正)을 시도한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그는 어떤 의도에서 자신이 ‘개혁의 동반자’라고 추켜세운 언론에 사정의 칼을 들이대려 했을까.
김대통령이 취임한 지 두달쯤 지난 93년 4월경 대검중앙수사부는 “언론사 사주라도 비리가 있으면 처벌하라”는 청와대의 특명(特命)을 받았다. 김대통령의 위세가 서슬퍼런 때라 검찰도 언론인들의 비리를 열심히 추적했다. 그러나 성과가 여의치 않았다. 검찰은 결국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슬그머니 사정의 칼을 거두었다.
당시 대검 고위 관계자의 기억.
“언론인 사정에 대한 청와대의 입장은 강경했습니다. 그러나 우선 구속할 만한 비리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또 섣불리 언론인 사정을 시작했다가 성과가 없을 경우 예상되는 비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청와대에서는 언론을 길들이려는 차원에서 언론인 사정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청와대는 검찰이 언론인 사정에 소극적이라고 생각했는지 93년 6월에는 아예 비리혐의가 있는 언론인 명단을 검찰에 내려보냈다.
서울지검의 수사간부가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김모검사에게 말문을 열었다.
“김검사, 언론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것 알지요. 언론도 정화해야 한다는 것이 저쪽(청와대 지칭)의 생각인 것 같아요. 비리 언론인들은 솎아내야 하지 않겠어.”
이 간부는 그러면서 청와대에서 내려온 자료를 건네주었다. C일보 등 3, 4개 언론사 간부들의 은행대출과 관련한 커미션비리와 개인비리 내용이 들어있었다.
문제의 자료를 넘겨받은 김검사는 한동안 고민해야 했다.
청와대에서 내려온 자료로는 당장 해당언론사 간부들을 사법처리하기 어려웠다. 이들을 처벌하려면 은행계좌 추적과 관련자 소환 등 본격 수사가 불가피한데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더구나 청와대에서 명단이 내려온 인사들만 수사하면 형평성시비는 물론 표적사정이란 오해를 받을 소지도 다분했다. 이번에도 결국 시일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됐다.
당시 청와대 사정 관계자의 설명.
“김대통령은 언론과 종교도 성역이어서는 안되며 개혁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언론의 자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겁니다. 그러나 언론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언론에 대한 본격적인 사정과 개혁은 주저하는 모습이었어요. 가끔씩 언론보도와 관련해 화가 나면 언뜻언뜻 자신의 힘을 써보려는 생각은 했던 것 같아요.”
민주계 핵심인사의 설명도 이를 뒷받침한다.
“김대통령은 자신이나 가족 측근을 비판하거나 잘못된 기사가 나오면 얼굴이 벌게지면서 불만을 토로하곤 했습니다.”
김대통령의 집권 5년은 언론과의 관계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집권기간 내내 국민의 인기에 지나치게 민감했다. 자연히 비판기능이 생명인 언론과는 끊임없는 긴장관계가 계속됐다.
그러면서 김대통령은 때때로 언론을 길들이거나 혼내야 한다는 생각도 했으며 언론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대해 화풀이성 조치도 취했다.
93년 11월30일 대검 중수부에서 김승연(金昇淵)한화그룹 회장을 구속한 것도 ‘언론 길들이기’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검찰이 김회장의 외화밀반출 혐의에 대한 수사에 나서자 청와대 수석비서관들 사이에는 “김회장을 구속하면 경향신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김회장 형제간에 벌어지고 있는 집안싸움에 휘말릴 소지가 있는 만큼 구속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언론에 김회장의 개인비리가 계속 나오는데 어떻게 봐줄 수 있느냐는 게 김대통령의 반응이었다.
당시 검찰 고위간부의 설명.
“검찰이 집요한 추적 끝에 김회장의 비리를 밝혀냈지만 대기업 회장이면서 언론사 사주인 김회장을 구속하는 것은 여러사정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김회장의 구속에는 박철언(朴哲彦)의원과 친한 사이였고 언론사 사주라는 측면도 일정부분 고려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언론에 대해서는 일종의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 셈이죠.”
그러나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낸 한나라당 이경재(李敬在)의원의 설명은 다르다.
“김대통령이 언론에 대한 사정이나 법적인 조치를 어떤 계획을 갖고 조직적으로 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언론보도에 대해 아주 화가 나면 평소 보관하고 있던 언론사나 언론인 관련 자료를 몇차례 활용하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김대통령이 언론 보도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 한토막.
김대통령은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할 때는 평소 친하게 지내는 언론인들을 만나 먼저 자문했다.
다시 이경재의원의 설명.
“김대통령은 민자당 대표 시절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을 만나 중대한 담판을 하기 전날에는 저와 단둘이 자리를 할 때가 많았습니다. 한번은 노재봉(盧在鳳)총리의 경질을 건의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더군요. 김대통령은 자기가 하는 행동에 대해 언론이 어떻게 평가할지를 항상 생각했습니다. 언론인들의 의견대로 따르면 결국 언론이 호의적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했던거죠.”
▼『재벌 언론경영은 안된다』▼
문민정부 초기 청와대 정책기획 수석비서관에 내정됐다가 도중하차한 전병민(田炳旼)씨의 동숭동팀은 김대통령의 이런 마음을 헤아렸는지 언론전업화 방안을 마련했다.
언론전업화 방안이란 중앙 일간지에 TV 채널을 나눠주고 언론 이외의 사업을 일절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김대통령이 언론사 사주들을 초청, 이같은 방침을 밝히고 문민개혁에 대한 지원을 당부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언론전업화구상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씨의 설명.
“안기부를 통해 각 언론사의 주식분포 사업현황 자료를 받은 뒤 회계전문가에게 4대 신문에 방송사를 주는 방안을 실무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회계전문가의 검토결과는 국회에서 입법조치만 하면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입법조치는 93년 9월 정기국회에서 하기로 계획됐지만 내가 중도하차하면서 계획은 무산됐습니다. 우리 입장은 적어도 재벌의 언론경영은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주계 출신 한나라당 의원의 설명.
“김대통령이 언론보도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여론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론이나 언론보도에 너무 민감하면 정치의 기본방향이나 정책의 일관성을 잃게 됩니다. 언론도 문제가 있으면 개혁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구조적 심층적인 개혁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몇사람 잡아넣어 혼내주는 식이어서는 곤란합니다.”
김대통령은 취임 초 언론관을 이렇게 피력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사용하던 ‘당근과 채찍’방식은 이제 끝났습니다. 정부와 언론은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바람직한 관계를 정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대통령이 자신의 다짐을 얼마나 지켰는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아 있다.
〈양기대·이수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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