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 30]박재윤 경제수석의 「독주」

  • 입력 1998년 3월 23일 09시 04분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93년 3월초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실.

신임 박재윤(朴在潤)경제수석비서관이 경제기획원 관계자들과 마주앉았다.

“문민정부의 경제정책은 앞으로 신경제로 부릅시다. 그리고 표기할 때는 이런 원칙을 지켜주세요. ‘신’과 ‘경제’는 붙여 쓰고 ‘신’자는 한자로 쓰세요. 그리고 신경제 앞뒤에 강조하는 의미의 꺾쇠를 붙여 「新경제」로 표기하세요. 착오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후 상당기간 정부 문건에는 신경제가 「新경제」로 표기됐다.

경제수석비서관이 신경제의 표기법 같은 자잘한 문제를 직접 챙기고 나서자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박수석의 생각은 달랐다.

“경제정책에는 조화가 중요해요. 여러 목소리가 나오면 안됩니다. 새로운 경제철학을 내걸면서 그 표기법부터 중구난방식으로 혼란이 생겨서야 되겠습니까.”

박수석은 「新경제」란 이름에 대단한 애착을 가졌다.

“문민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명칭을 놓고 친구가 하는 광고기획사에 자문했습니다. 그냥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돈을 주고 만들어야 더 귀중하게 느껴질 것 같아서 개인돈 1백만원을 부담했습니다. 「新경제」로 잠정결정한 뒤 대통령당선자에게 보고했더니 당선자도 매우 흡족해 했지요.”

당시 경제기획원 쪽에서는 박수석의 이같은 태도를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新경제」란 이름은 서울 효자동의 유명한 작명가 김모씨가 골라준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기획원쪽과 잇단 마찰▼

신경제 도입과정에서 이와 비슷한 일은 한번 더 벌어졌다. 기획원 실무자들이 경제수석에게 ‘93년 경제운용계획’을 보고하자 박수석이 첫머리부터 꼬투리를 잡았다.

“경제운용계획이 뭡니까. 경제운영계획이라고 고치세요. 사전에 ‘운용’이란 말은 ‘사물을 부리어 씀’이라고 나와 있어요. 정부의 경제정책이란 것이 나라살림을 잘 관리하고 운영하는 일이지 무엇을 부리어 쓰는 일이 아니잖아요.”

30년 이상 ‘경제운용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해온 기획원 실무자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이미 인쇄가 끝난 서류나 문건은 운용이란 오자(誤字) 아닌 오자 때문에 모두 파기됐다.

문민경제는 경제기획원 실무자들과 박수석의 껄끄러운 관계 속에 출발했다. 말이 좋아 껄끄럽지 사실은 기획원쪽이 일방적으로 끌려가면서 당한 과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박수석은 92년 6월부터 김영삼(金泳三·YS)민자당 대통령 후보의 경제특보 자격으로 선거캠프에 합류해 일해온 ‘준비된 보좌관’이었다.

반면 이경식(李經植)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은 YS 취임 보름 전인 93년2월10일 입각통보를 받았을 뿐이었다.

「新경제」는 과연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박수석의 설명.

“김영삼대통령은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직후인 6월 말경 비서실에 집권에 대비한 경제개혁과 경제시책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신경제는 ‘민주화’라는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경제 측면에서 구현한 것입니다.”

홍인길(洪仁吉)전청와대총무수석비서관의 보충설명.

“YS는 후보로 선출된 뒤 특보들을 서울 여의도 63빌딩의 한 회의장에 불러모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YS는 ‘집권하면 여러분은 나와 함께 청와대에 들어갑니다. 사전준비 작업을 철저히 해주세요’라고 당부했습니다.”

박수석은 이른바 ‘박재윤 사단’을 동원, 9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5백쪽 분량의 ‘「新경제」보고서’를 완성해 93년 3월 YS에게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행정기구 개편 등 작은 정부 구상, YS가 강조하는 ‘변화와 개혁’을 실천하기 위한 국민의식개혁 등 광범위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었다. 이 보고서는 그후 공식적인 ‘신경제 계획’ 수립의 기초가 됐다.

박수석은 교수(서울대 경제학과)출신 답지않게 경제정책 입안작업에 열정적으로 몰두했다. 신경제 1백일 계획을 만들 때는 청와대 집무실에 간이침대까지 갖다 놓고 밤낮없이 일했다.

그가 YS캠프에 합류하면서 서울대 경제학과 학생들에게 남긴 말.

“경제학자로서 독창적인 학문영역을 개척해 세계적인 학자가 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다. 그러나 모든 학자가 이런 재능과 행운을 허락받지는 못한다. 차선의 길이 현실에 참여해 국가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차선의 보람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는 당시 경제부처에서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한 ‘시장주의’와는 좀 다른 길을 걸었다.

신경제 1백일 계획은 ‘인플레를 초래하지 않는 방법으로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데 초점을 두었다. 고통분담의 논리 아래 △공무원 봉급동결 △공산품 가격동결 △예산삭감액을 재원으로 한 제조업 지원 등을 주요내용으로 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동결이란 것은 사실상 ‘5공(共)식’의 억지 정책이었다.

또 기존 정책방향이 ‘자율의 확대’에 무게를 두었다면 신경제는 ‘참여와 창의’를 강조했다. 여기서 참여란 ‘정부와 민간이 함께 주도한다’는 뜻으로 민간주도를 뜻하는 ‘자율’을 대체하기 위해 창안된 구호였다.

행정부나 재계 등에서는 당연히 박수석과 생각이 달랐다. 학계에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았다. 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박수석팀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자 당연히 ‘독주’ ‘독선’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YS에게 독주론 시비에 대해 사전양해를 구해둔 상태였다.“각하, 분위기를 바꾸려면 충격요법이 필요합니다. 주위의 비판은 미리 각오해야 합니다.”

박수석의 이런 측면은 수석으로 취임하기 전부터 표출됐다.

박수석은 93년 초 이용만(李龍萬)재무부장관에게 공금리의 인위적인 인하를 요청했다. 일단 경제활성화에 국력을 집중하고 실질성장률이 7%를 넘어서면 금융과 세제상의 개혁을 해야한다는 대통령 자문단(6인위원회)의 결론이 난 뒤의 일이다.

이에 앞서 이장관은 대선 직전인 92년 11월 ‘어떻게든 경기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공금리 인하계획을 발표했다가 조순(趙淳)한국은행 총재가 금리인하의 부당성을 정면에서 지적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판국에 차기실세인 박수석이 금리인하를 요청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93년 1월26일 금리를 최고 3%포인트 내렸다.

신경제의 경제철학은 일관되게 ‘선 경기부양, 후 경제개혁’이었다.

박수석의 독주는 강봉균(康奉均) 경제기획원 차관보를 내쫓을 때 절정을 이룬다.

93년 5월 청와대에 들어간 이경식부총리를 박수석이 잠깐 불렀다.

“부총리님, 강차관보를 경질해주십시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강차관보는 매우 명석하고 경험이 많은 관료예요. 그건 그렇고 어떻게 수석이 내각의 인사문제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단 말이오.”

“일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양반 하고는 도저히 신경제 못만들겠습니다. 말을 듣지 않아요.”

“허. 내 참….”

▼「세계화」에 밀려 시들▼

기획원 차관보는 신경제 5개년 계획을 짜면서 각 부처의 안을 총괄취합해 경제수석에게 보고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행정관료가 보기엔 아무래도 학자출신 수석의 아이디어에는 허점이 있는 법. 성격이 꼬장꼬장한 강차관보가 수석이라고 해서 할말을 피하지는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며칠 후 강차관보는 대외경제조정실장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역시 당시는 박수석의 시대였다.

이렇게 작성된 신경제는 한동안 한국 경제정책의 성경 역할을 했다. 그러나 93년 말 쌀시장이 개방되고 국제화 구호가 나오는 등 경제여건이 조금씩 바뀌었다. 94년 말 ‘세계화’가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고 박수석이 재무장관을 거쳐 통산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신경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급속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신경제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신경제를 직접 집행한 이부총리는 퇴임 직후인 94년2월에 벌써 ‘신경제의 종말’을 예언했다.

“신경제 내용 자체에 잘못은 없습니다. 그러나 장기계획은 얼개만 짜야 해요. 경제란 것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입니다. 이 때문에 장기계획을 만들면서 세세한 부분까지 욕심을 내면 계획 자체가 쓸모없어져 결국 폐기되고 맙니다. 김대통령도 1, 2년만 지나면 오히려 번거로운 존재로 생각할 겁니다.” 그의 예언이 맞았던 것일까.

이부총리 시절 그의 자문관을 지낸 양수길(楊秀吉)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신경제가 외환위기를 잉태한 측면이 있습니다. 신경제정책은 개혁을 자꾸 뒤로 미루려고 했어요. 특히 금융개혁 재벌개혁 등 경제의 근본구조를 가다듬는 일에 소극적이었지요. 개혁이 필요한 시기에 개혁하지 않아 결국은 외환위기의 원인이 됐다고 봅니다.”

실제로 ‘95년부터 경상수지 흑자실현, 물가 3%대 안정’이라는 야심찬 목표와는 달리 경상수지 적자누적과 물가불안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경제구조 개혁마저 실종됨으로써 결국 ‘경제신탁통치’의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다.

〈허승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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