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 34]금융실명제 둘러싼 논쟁

  • 입력 1998년 4월 2일 20시 26분


금융실명제를 둘러싸고 경제부처 공무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란은 비유법으로 이뤄졌다. 고위 관료들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경제실력을 고려해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통해 설명한 데서 비롯됐다.

대표적인 것이 ‘외과수술론’ ‘목욕탕수리론’ ‘뒤주론’ 등 세가지.

외과수술론은 환자를 수술하려면 일단 몸을 회복시켜놓고 해야 한다는 것.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실명제도 경제가 바닥에 있을 때 하면 경제가 완전히 주저앉고 만다는 주장. 박재윤(朴在潤)경제수석의 논리.

‘목욕탕 수리는 손님이 없는 여름철에 해야 한다’는 것이 목욕탕론. 실명제 같은 충격적인 조치는 경제가 나쁠 때 해야 잃는 것이 적다는 논리였다. 실명제 추진세력의 대표적인 의견이었다. 심지어 김용진 재무부 세제실장은 ‘경제는 생명체라는 주장은 잘못됐다. 수술해도 절대 죽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뒤주론은 홍재형(洪在馨)재무장관이 창안한 것으로 실명제의 강도에 관한 주장이었다.

“뒤주에 있는 쌀은 둥근 바가지로 퍼낸다. 그래야 뒤주 구석에 쌀이 조금씩 남게 된다. 경제에도 법망이 안미치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돈이란 어두운 곳을 좋아한다.”

재무부 금융 관계자들은 뒤주 구석에 쌀을 많이 남겨둬야 한다는 입장에서 경제에 충격이 덜한 ‘큰 바가지’를 선호했다. 그러나 재무부 세제실이나 기획원 관계자들은 형평문제를 중시해 ‘작은 바가지’를 좋아했다. 김대통령은 아예 ‘빗자루’로 구석구석 깨끗이 쓸어내고 싶어했다.

[금융실명제 약사]

▼61년 7월〓예금과 적금 등의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가명에 의한 금융거래 시작

▼82년 7월〓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을 계기로 강경식(姜慶植)재무부장관은 ‘83년부터 금융실명제를 전면 실시한다’는 ‘7·3조치’ 발표

▼82년 9월〓금융실명제법 국회 통과

▼82년 12월〓전두환(全斗煥)대통령, 실명제 반대파의 집요한 공세로 ‘86년 이후 대통령령이 정하는 날 시행하겠다’고 후퇴

▼88년 7월〓노태우(盧泰愚)대통령, ‘91년까지 실명제를 도입한다’는 방침 발표

▼89년 4월〓재무부에 ‘금융실명제 실시준비단’ 발족

▼90년 4월〓경기악화와 전경련 등의 반대로 이승윤(李承潤)부총리―김종인(金鍾仁)경제수석 팀 실명제 유보결정

▼93년 8월〓김영삼(金泳三)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실명제 전격 실시

▼97년 12월〓전경련 등은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실명제를 지목했고 주요 대선후보들이 이 주장을 수용, 실명제 골격이 크게 훼손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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