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에 들어간 지 한달쯤 지난 한이헌(韓利憲)경제수석비서관이 이회장을 방문했다. 한수석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회장님, 승용차 사업을 하고 싶으면 승용차사업을 해야하는 논리를 개발하고 삼성이 뭔가 노력해 명분을 쌓아야지 왜 대통령을 괴롭힙니까?”
부산시민들이 승용차공장 유치를 요구하며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은 김영삼(金泳三)대통령에 대한 삼성의 ‘압박공작’ 때문이라는 항의였다.
이회장은 “무슨 노력 말입니까”고 되물었다.
“93년 삼성이 구조조정을 하겠다며 계열분리를 약속했지만 지지부진하지 않습니까. ‘문어발 경영’이라는 비난이 수그러들어야 승용차사업 진출에 대한 여론도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평소 형용사와 부사를 생략한 채 명사와 동사만을 사용해 자신의 의사를 최대한 간략하게, 그리고 아주 천천히 전달하는 이회장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면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뭐라고요. 재현(조카인 제일제당 이재현·李在賢 부회장을 지칭)이가 권력을 앞세워…김현철(金賢哲) 김기섭(金己燮)과 손잡고 삼성을 뜯어먹으려고…남의 집안일에 왜 그 사람들이 끼여들어….”
자신의 말이 이상하게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한 한수석은 당황했다.
“뭘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제가 계열사를 누구에게 주라느니 말라느니 그런 말을 하러 온 사람 같습니까. 먼저 국민을 설득하라는 겁니다. 저는 그 두사람과 이번 건에 관해 단 한마디 얘기도 나눈 적이 없습니다.”
한수석의 단호한 태도에 이회장이 한발짝 물러섰다.
“음, 죄송합니다. 어쨌거나 현철이나 김기섭 같은 사람은 이 정권이 끝난 뒤 반드시 청문회장에 설 겁니다.”
면담은 장장 네시간 동안이나 계속됐다. 당시 삼성의 계열사 분리작업이 진척되지 않은 것은 이회장 형제간 재산분배 문제 때문이었다. 이회장은 이 자리에서 제일제당과 한솔그룹이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와 그의 측근인 김기섭 안기부기조실장이 결탁, 삼성의 승용차사업 진출문제를 재산분배 협상의 ‘압박용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는 시각을 분명히 했다.
김현철씨는 경복고 동문인 이재현씨와 친한 사이였다. 한솔 계열사인 신라호텔 총지배인 출신인 김기섭씨도 삼성에 대한 반감이 컸다. 이에 대한 삼성그룹 한 관계자의 설명.
“김씨는 신라호텔 총지배인 자리를 무척 좋아했지요. 이인희(李仁熙)한솔그룹고문의 신임도 받았지만 호텔 출입이 잦았던 김대통령 등 정계 거물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어요.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는 최고의 자리였죠. 그런데 갑자기 삼성그룹에서 그를 삼성전관 기획담당 상무로 발령을 내는 바람에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진 겁니다. 김씨는 한달만에 퇴직하고 김대통령의 상도동에 합류했습니다.”
▼ 남 집안일에 왜 끼여들어 ▼
한수석이 이회장을 찾아간 것은 그날 오전 김대통령이 부산지역 분위기를 전해 듣고 격분해한 수석을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한수석, 이건희회장 나쁜 사람 아니야? 자기가 자동차를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왜 부산시민을 선동해서 ‘김영삼이 나쁜 사람’이라는 소리가 나오게 해. 이회장이 그런 것 맞지?”
한수석은 이회장을 은근히 두둔했다.
“이회장이 부추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장을 짓고 싶은 사람이야 부산시민들의 불만이 일어나면 좋아하지 그걸 막으려 하겠습니까. 부산시민들도 대통령께서 공장을 끌어오지는 못할망정 오겠다는 공장을 막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신발과 합판산업이 몰락한 뒤 지역경제가 거덜난 부산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대통령도 한숨을 내쉬었다.
“허 거참, 그게 대선 공약이잖아. 삼성이 가만히 있어도 부산에서 불만이 터져나올 판에 부산시민을 선동까지 하니까 말야. 내가 그걸 잘 아나. 상공장관(김철수·金喆壽)이 안된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한수석은 그 자리에서 이회장을 만나고 오겠다고 말했다.
취임 초 ‘한푼도 안 받겠다’고 선언한 김대통령의 반응.
“그래. 그런데 한수석, 거기 가서 뭘 받으면 절대 안돼.”
한수석이 떠나기 전 김대통령은 전화를 통해 다시 한번 당부했다.
“구두표 한 장도 받으면 안된다. 내 말 알겠지.”
삼성의 자동차사업 허가 문제는 정부내에서도 찬반의견이 엇갈렸다. 원칙적인 측면을 주로 다루는 경제기획원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찬성, 업계를 담당한 김철수상공부장관과 한국산업연구원(KIET)은 반대입장을 취했다.박재윤(朴在潤)재무장관도 경제수석 시절에는 반대했다.
박관용(朴寬用)전청와대비서실장의 설명. “김대통령은 김철수장관이 기술자가 모자라고 과열 스카우트가 벌어지며 시장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의견을 내는 바람에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또 현철씨와 김기섭씨도 반대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최형우(崔炯佑) 문정수(文正秀) 서석재(徐錫宰) 한이헌씨 등과 대통령에게 허가해야 한다고 진언했습니다. 대통령은 이미 불가입장을 사실상 표명한 터라 번복할 계기를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던 겁니다.”
김대통령이 번복의 계기로 삼은 것은 ‘세계화’였다.
94년11월19일. 호주 시드니에서 새로운 국정지표로 세계화를 제시한 뒤 귀국하는 비행기안에서 김대통령은 한수석에게 말을 건넸다.
“국경없는 세계화 시대 아니오? 국가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면 삼성의 승용차사업을 허용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한수석 생각은 어떻소?”
“그렇습니다, 각하. 세계화를 하려면 외국기업이 한국에서 공장을 짓겠다고 할 때 환영하고 도와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업이 공장을 짓겠다고 하는 것을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취임 이후 1년8개월 동안 삼성의 집요한 공세를 버텨온 김대통령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한이헌씨가 경제수석이 된 지 45일만의 일.
삼성의 승용차사업 진출과정은 사실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92년 상용차시장 진출을 계기로 자동차사업에 뛰어든 삼성은 문민정부 출범 직후부터 승용차사업을 위한 정지작업을 벌였다.
이건희회장의 신경영구상과 대대적인 홍보활동, 반도체사업으로 벌어들인 엄청난 돈으로 벌인 사회문화활동 지원, 가전 및 의류제품의 가격인하, 사회봉사단 발족 등 우호적인 여론 형성을 위해 공도 많이 들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포석은 역시 공장을 부산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당초 삼성 기술진은 평택 당진 등 서해안 충청권 지역을 승용차공장 입지로 선호했다. 물류비용 절감과 인력확보에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93년 말 부산시가 신호공단을 제의했다.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 지역인 이 곳은 지반이 연약해 자동차공장 부지로는 부적격 판정을 받은 땅. 그러나 부산시민의 지원이 필요했던 삼성은 덜컥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 金철수상공 끝까지 반대 ▼
삼성은 김철수장관이 불가입장을 확정한 직후인 94년5월부터 ‘부산시민 움직이기 작전’에 들어갔다. 작전팀은 이경우(李庚雨·현 삼성카드 대표부사장)그룹 비서실전무 등 7명. 팀관계자의 술회.
“여론 조성은 땅짚고 헤엄치기였습니다. 부산경제가 좋지않다보니 부산시민이라면 누구나 공장을 유치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지역 언론사나 사회단체에서 먼저 연락이 올 정도였으니까요.”
부산시민의 1백만명 서명운동과 시위 등이 계속되면서 지역여론이 악화하자 삼성그룹 정보팀은 이런 보고서를 올렸다.
‘김현철씨가 부산의 분위기에 깜짝 놀라 적극 반대 입장에서 관망세로 돌아섬. 김대통령에게 반대입장을 주입하는 주요 조언자가 사라졌다는 의미임.’
11월 이후 허용론이 대세를 이루자 김상공장관은 슬그머니 입을 다물어버렸다. 김대통령의 세계화구상(11월17일)과 공정경쟁을 강조한 무역의 날 연설(11월30일)이 있고난 뒤인 12월2일 박운서(朴雲緖)상공부차관이 삼성승용차 허용을 발표했다. 김장관은 끝까지 반대했던 터라 박차관에게 발표를 떠넘긴 것.
김장관은 94년4월말 김대통령에게서 삼성승용차 불가 방침을 재가받고 이를 공표하려 했다. 그러나 박관용비서실장이 ‘부산 민심도 있으니 발표만은 하지말라’며 극력 저지했다. 김대통령도 같은 의견이어서 발표를 미뤘다. 그러나 쐐기를 박아두고 싶었던 김장관은 주요 일간지 기자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해놓고 집게손가락으로 식탁 위에 한자로 ‘불가(不可)’라고 써 불허방침을 흘리기도 했다.
삼성은 부산시민 덕분에 사업권을 따냈지만 이 때문에 애도 많이 먹었다. 신호공단의 지반이 자꾸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삼성이 공단조성에 들인 돈은 평당 1백여만원. 이는 현대의 아산만공장과 대우의 군산공장에 비해 3배가 넘는 비용으로 삼성승용차의 원가를 끌어올리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삼성자동차와 관련 김대통령은 대선 승리를 위해 허가하겠다고 공약하고 ‘삼성과 유착됐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생각을 바꾸었다가 부산 여론때문에 다시 입장을 바꾼 셈이다. 국민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중대사안의 처리를 김대통령은 철저히 비경제적인 논리로 일관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허승호·이희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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