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에서 활동중이던 학생운동 지도부 출신들은 ‘개혁세력의 청와대 입성’이라며 상당한 기대를 걸었다.
일부는 김영삼(金泳三·YS)정부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하며 애초부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당수는 YS정부를 군사정부에서 민간정부로의 정권이양을 이뤄낸 첫 정부로 평가하고 청와대에 들어간 동료들을 격려했다.
청와대에 들어간 사람들도 “지켜봐 달라”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광화문 사단 멤버들은 당시 일본 막부(幕府)시대의 한 봉건영주가 개혁저항세력을 물리치고 마침내 개혁에 성공한 내용을 담은 ‘불꽃’이라는 소설을 돌아가며 읽을 정도로 의욕을 가졌었다.
그러나 학생운동권 출신들의 우호적인 관계는 ‘일부 광화문 사단 멤버들이 권력의 맛에 취해 기성정치인과 다를 게 없더라’는 등의 소문이 퍼지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들의 관계는 우루과이라운드파동을 계기로 회복불능 상태가 돼버렸다. 총학생회 간부 출신 김모씨(37)는 “농민들의 생존권 문제가 걸린 쌀시장 개방 협상에 너무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고 회고했다. 운동권 출신들은 문민정부의 대북정책이 5,6공 정권 때보다 더욱 강경하다는 평가와 함께 신뢰를 거두었다.
광화문 사단 멤버들도 재야 동료들을 ‘현실을 모르고 말만 앞세우는 이상주의자’로 여기게 됨으로써 술집에서 마주쳐도 외면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이현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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