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계 소장파 핵심인사 Q씨는 몇몇 가까이 지내는 정부 고위공직자들과 저녁 술자리를 가졌다. 이석채(李錫采)농림수산부차관도 청와대 비서관들과 함께 그 자리에 참석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Q씨는 이차관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개각에 이어 차관급 인사가 있을 것 아니오. 어디를 원하는지는 알지만 그냥 스테이(유임)하는게 좋을 것 같소. 거기 있다가 바로 농림수산부장관으로 올라가면 될 것 아니오.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얘기돼 있어요.”
Q씨로서는 정말 ‘마음먹고 귀띔해준’ 극비사항이었다. 김대통령의 인사가 늘 그랬듯이 얼마 후 단행된 ‘12·26 차관급 인사’도 극도의 보안속에 이뤄졌다. 주무장관들도 자기 부처 차관으로 누가 결정됐는지를 하루 이틀 전에야 알았을 정도였다.
당시 차관급 인사안의 농림수산부차관 자리는 ‘이석채 유임’이었다. 최인기(崔仁基)농림수산부장관도 사석에서 “이차관은 나와 계속 일하게 될 것”이라고 흘릴 정도였다.
▼ YS 재가후에도 자리 바꿔 ▼
Q씨는 이차관이 당연히 반가워할 줄 알았다. 하지만 Q씨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Q씨의 귓속말에 화들짝 놀란 이차관의 표정은 금방 울상이 됐다. 그러고는 비장한 어조로 내뱉었다.
“재정경제원으로 가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정부산하) 연구소로 가겠습니다.”
70년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줄곧 기획원에서 잔뼈가 굵었고 노태우(盧泰愚)정권 말에는 요직 중의 요직이라는 기획원 예산실장까지 지내고 김영삼정부 출범 후 농림수산부차관으로 옮긴 이차관이었다.
그런 이차관이 내뱉은 ‘연구소행(行) 불사’는 바로 ‘친정’으로 복귀하고야 말겠다는 나름대로의 의지 표현이었다. 또 당시 정부는 이미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하기로 결정, 조만간 재경원의 탄생을 눈앞에 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차관의 속내를 전혀 몰랐던 Q씨는 아니었지만 순간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연구소는 누가 보내준다고 해요. 장관을 하라는데 왜 그러는 거요.”
하지만 이차관은 Q씨가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자리를 뜨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Q씨에게 이원종(李源宗)청와대정무수석비서관의 전화가 걸려왔다.
“당신은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해가지고 이석채가 난리를 치게 만드는 거요. 이석채가 저러는데 어떻게 하지….”
이원종수석과 이차관은 경복고 선후배 사이로 각별한 관계였다.
이수석과는 물론이거니와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와도 가까웠던 민주계 30대 소장파 S씨의 설명.
“이차관은 Q씨에게서 그런 얘기를 듣고는 곧장 이원종수석과 김소장(현철씨)에게 매달렸던 모양입니다. 이수석이나 김소장도 곤란했죠. 재경원차관에는 강봉균(康奉均·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기획원차관이 내정돼 있었고 이미 김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아놓은 상태였거든요.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이원종수석이나 김소장도 이차관이 하도 매달리니까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아마 인사실무를 맡았던 김무성(金武星)민정비서관이 총대를 메고 김대통령한테 얘기한 것 같아요.”
엉뚱하게 자기보다 행정고시 1년 후배인 이차관에게 밀린 강차관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으로 옮겨야 했다. 대신 종전까지 경제기획원차관이 맡던 차관회의 사회권은 총리 행조실장에게 돌아갔다.
정황은 분명해 보인다. 이미 김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은 재경원차관 자리가 바뀔 수 있었던 것은 김현철―이원종 라인의 영향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사실 김영삼정권이 출범한 지 2년이 가까워지고 있던 이 무렵 현철씨의 영향력은 이미 ‘정점(頂點)’에 도달해 있었다.
이회창총리에 이어 ‘세계화 내각’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들어선 이홍구(李洪九)총리 내각은 인사실무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부터 ‘소통령’으로 통하던 현철씨의 의중이 반영됐다.
이홍구총리 발탁에 이어 94년 12월23일 단행된 개각으로 19개 부처 장관과 청와대 진용이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
홍재형(洪在馨)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 김덕(金悳)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공로명(孔魯明)외무 김용태(金瑢泰)내무 안우만(安又萬)법무 이양호(李養鎬)국방 김윤환(金潤煥)정무1 박재윤(朴在潤)통상산업부장관 권영해(權寧海)안기부장 한승수(韓昇洙)청와대비서실장 김광석(金光錫)경호실장 등.
그러나 현철씨와 보이지 않는 갈등을 빚어온 것으로 알려진 박관용(朴寬用)비서실장 박상범(朴相範)경호실장은 이 때 대통령정치특보 평통사무총장으로 각각 자리를 옮겼다.
민주계 소장파 S씨의 증언.
“김소장은 특히 인사문제에 관해서는 극도로 민감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딱히 누구를 끼워넣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영향력에 대한 일종의 ‘과시욕’같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청와대 인사실무팀이 그걸 모를 리 없었죠. 그래서 아예 김대통령한테 올리는 개각안의 밑그림을 만들기 전에 김소장의 안을 받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김현철 개각안’을 미리 인사참고자료로 받은 셈이죠. 하지만 김소장이 어느 정도의 안을 넘겨줬는지, 발표된 각료 가운데 누구 누구가 ‘김현철 개각안’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또 설사 ‘김현철 개각안’에 올라있던 사람이라고 해서 ‘김현철맨’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경위는 그랬지만 당시 언론사들이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12·23개각을 ‘능력과 전문성을 갖춘 인사’로 평가하는 반응이 70% 수준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김대통령 취임 초기만 해도 현철씨의 인사개입은 이 정도는 아니었다. 현철씨는 초기만 해도 사적인 인연을 갖고 있던 검찰 중간간부를 검사장으로 승진시키려 했지만 담당 비서관이 “그렇게 되면 동기들보다 2,3기나 빨리 승진하게 된다”며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였다.
또 현철씨의 경복고 선배일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김현철맨’으로 알려진 오정소(吳正昭)전안기부1차장도 정권 초기에는 오히려 불이익을 받았다는 것이다. 전 안기부 고위간부의 증언.
“김대통령이 취임하자 안기부 내에서는 오정소씨가 1차장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김덕부장도 취임 직후 그런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김덕부장은 그런 소문이 현철씨나 안기부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판단, 오히려 오씨를 불러 자기 생각을 얘기해 준 뒤 ‘인천지부장으로 가서 1년 정도 있다가 오라’며 인천으로 보냈습니다. 또 김기섭(金己燮)기조실장의 대구 영남고 선후배 사이였던 Y씨도 정권이 바뀐 직후 대구지부장을 희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년 뒤에는 결국 대구지부장으로 나갔지만….”
인천지부장으로 내려간 오정소씨는 그러나 1년 뒤 안기부 국내정치 담당인 1차장으로 전격 발탁됐다. 현철씨의 영향력이 개입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대략 현철씨의 영향력, 특히 인사개입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시점도 김대통령 취임 1년쯤 지났을 때부터라는 것이 현철씨와 권부(權府)를 잘 아는 사람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여기저기서 ‘김현철 라인’에 대한 소문이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모장관은 현철씨가 직접 장관내정 통보를 했다더라’‘장관치고 현철씨에게 줄을 대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등의 소문이 관가에서부터 나돌았다.
소문처럼 정말 모든 인사는 현철씨에게로 통했을까. 4선의 민주계 중진은 이런 물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 “현철씨에 줄대기”소문 무성 ▼
“현철씨가 아무리 ‘총명한 참모’이고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김대통령이 현철씨 얘기를 듣고 인사를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현철씨가 누구보다 인사 내정안을 빨리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그걸로 내정자들에게 마치 자기가 인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처럼 과시한 것이 소문의 출발점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현철씨는 바둑을 매우 좋아했는데 정석(定石)을 배우기보다는 ‘꼼수’를 먼저 배운 셈이죠. 실제로 현철씨는 인사내정안을 미리 입수해 청와대에서 통보가 가기도 전에 해당자들을 미리 접촉, 자기가 마치 통보하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겁니다. ‘열심히 하시라’는 격려와 함께 말입니다.”
한보비리사건 수사 관계자의 설명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97년3월 말경 현철씨의 측근인 ㈜심우 대표 박태중씨의 집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는데 청와대 인사자료가 다량으로 발견됐습니다. 박씨는 현철씨가 숨겨놓으라고 전해준 것이라고 진술했습니다. 자료들은 모두 청와대 민정비서관실에서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차관급은 물론 고위공직자들을 2,3배수로 선정해 그들의 신상명세에 관한 개인파일을 정리한 것들이었습니다. 김대통령 취임 초기의 이충범(李忠範)비서관에서부터 김무성 배재욱(裵在昱)사정비서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인사자료를 받아본 것 같았습니다. 자료 검토 결과 대통령에게 보고도 되기 전의 자료들이었습니다.”
결국 현철씨는 자신의 인사개입과 국정개입에 대한 설(說)들이 나돌기 시작할 때 자중(自重)하거나 ‘과시욕’을 자제하지 못함으로써 설을 기정사실화하고 몰락을 자초한 셈이다.
〈김창혁·이수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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