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3월 17일. 김현철(金賢哲)씨는 대국민 사과 성명으로 국민 앞에 ‘항복’했다.
김영삼(金泳三·YS)전대통령이 국민적 분노를 몰고온 한보비리 1차 수사결과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한지 20일만의 일이었다.
현철씨에 대한 1차 수사는 당시 야당이던 국민회의측에서 한보특혜대출 비리의 배후로 지목된 현철씨가 국민회의 당직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이 계기가 됐다.
검찰은 2월21일 현철씨를 고소인 자격으로 소환해 26시간 동안 조사한 뒤 무혐의 처리했다.
그러나 한보사태와 현철씨의 국정개입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여론이 수그러들기는커녕 갈수록 고조됐다. 검찰에 대한 국민의 비난도 위험 수위를 넘고 있었다.
▼ 「희생양」 내세워 정면돌파 ▼
3월 초 검찰 내부에서도 전례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중견 실무검사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 대검 간부를 찾아간 중견검사들은 “잘못하면 검찰이 다 망합니다. 성역 없이 모든 것을 수사해야 합니다”라고 직언했다.
당황한 간부가 이들에게 물었다.
“김영삼대통령 것(대선자금)이 나오면 어쩔래?”
“당연히 해야죠.”
“DJ(당시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총재) 것이 나오면?”
“그래도 합시다.”
“그러다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해야 합니다.”
“당신들 미쳤나?”
“그건 아닙니다.”
상황은 점점 급박해지고 있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청와대와 여권에서는 검찰 수뇌부를 ‘해고’함으로써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의견이 구체적으로 제기됐다.
당시 검찰과 청와대의 의견조율 과정에 참여했던 K씨의 설명.
“한보사건과 현철씨 수사결과에 대한 국민의 비난여론이 들끓자 김대통령은 특유의 승부수로 정면돌파를 하려 했습니다. 김기수(金起秀)검찰총장을 희생양으로 삼아 위기를 돌파하려고 한거죠. 김총장이 지휘 능력이 없다는 것을경질 이유로 삼는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졌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K씨는 “현철씨와 김기섭(金己燮)전안기부 운영차장이 결사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계속되는 K씨의 설명.
“현철씨와 김전차장은 ‘우리 편에서 생각할 때 그래도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 김총장인데 그를 바꾸면 안된다’고 강력히 건의했고 이 때문에 김대통령도 마음을 돌린 겁니다.”
그러나 당시 검찰 고위간부의 설명은 다소 다르다.
“검찰에 대한 비난여론이 거세지고 이것이 정권의 부담으로 이어지자 국무총리선에서 대책의 하나로 검찰총장 경질을 생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종수(文鍾洙)민정수석이 내각의 의견을 수렴해 김대통령에게 검찰총장 경질을 건의했지만 김대통령이 ‘검찰총장은 임기제가 아니냐’며 수용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문전수석은 “당시 총장 경질문제가 제기된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그러나 자신은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을 경질해서는 안된다”며 김대통령을 만류했다는 것.
우여곡절 끝에 총장 경질은 무산됐고 청와대에서는 대안으로 한보사건 수사책임자인 최병국(崔炳國·현 전주지검장)대검 중수부장을 교체하기로 결론이 났다.문제는 후임 중수부장에 누구를 기용하느냐였다.
사법시험 7회 동기인 심재륜(沈在淪·현 대구고검장)인천지검장과 김진세(金鎭世·현 대전고검장)부산지검장이 물망에 올랐다.
심검사장은 서울지검 특수1부장 등을 지낸 전형적인 특수 수사통. 그는 일찍부터 대검 중수부장 물망에 올랐으나 후배들에게 연거푸 추월당해 대전과 광주 인천 등지의 지방검사장을 지냈다. 그는 지나치게 ‘강골(强骨)검사’로 알려져 검찰 수뇌부와 권력 핵심에서 버거워했다. 반면에 김검사장은 원만하고 합리적이긴 했지만 특수수사 경험이 적은 편이었다.
3월21일. 최상엽(崔相曄)법무부장관은 현철씨에 대한 2차 수사 사령탑에 심검사장을 전격 기용했다. 권력 핵심과 검찰 수뇌부는 왜 버거운 상대를 택했을까.
당시 대검 간부의 설명.
“당시 권력핵심은 심검사장이 예뻐서 중수부장을 시킨 것이 아닙니다. 두번이나 ‘물’을 먹인 그를 중수부장에 임명한 이유는 한마디로 ‘이이제이(以夷制夷)’였습니다. 청와대에서는 현철씨가 결백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나오지 않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특수부 검사의 대부’까지 나서서 다시 수사했는데도 ‘아무 것도 안나오지 않았느냐’며 현철씨를 살려내려고 했던 겁니다.”
현철씨에 대한 1차 조사에서 면죄부를 주었던 검찰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재수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주임검사는 한보수사에서 비켜서 있었던 이훈규(李勳圭·현 법무부 검찰1과장)중수3과장이 내정됐다.
이과장은 3월초 3과장으로 부임한 직후부터 현철씨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신문기사도 빠짐없이 모았다.
이과장은 현철씨의 측근인 ㈜심우 대표 박태중(朴泰重)씨의 집과 회사 등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작성, 상부에 결재를 올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다”는 답변이 내려왔다. 두번째 결재를 요청했을 때는 ‘현직 대통령 아들의 주임검사가 된 것에 만족하라’는 얘기도 들렸다.
그러는 사이에 중수부장이 경질됐다.
당시 중수부 수사검사의 기억.
“최병국 중수부장은 자신이 경질된 사실을 3월21일 당일 오전10시가 넘어서야 알았습니다. 정신없이 짐을 꾸리는 최중수부장에게 이과장이 찾아가 다시 압수수색영장을 들이밀었어요. 이과장은 최중수부장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 뒤 ‘가시기 전에 마지막 선물을 달라’며 결재를 요구했습니다. 경황이 없던 최중수부장은 ‘알았어. 지난번 그것이지’하며 바로 서명했습니다.”
압수수색영장 내용은 가히 폭발적인 것이었다. “박씨가 94년 7월부터 12월 사이에 한보철강의 대리인으로 독일의 SMS사(社)와 열연설비 수입을 계약하는 과정에서 실제가격보다 50% 높게 계약서를 작성하는 수법으로 2천억원의 리베이트를 받아 현철씨에게 제공했다는 의혹이 있어 사실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곧 언론에 대서 특필됐고 큰 파문이 일었다. 검찰 상부에서도 “근거가 있는 것이냐”며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확인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야당의원의 주장을 ‘의혹’ 차원에서 그대로 영장에 기재한 것이었다.
검찰 내부에서 이과장을 비난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당시 수사 관계자의 설명.
“그렇게 민감한 사안을 그대로 영장에 기재한 것은 검사로서는 ‘파격’이었습니다. 당시 중수부 검사들 사이에서는 ‘이과장이 특수부 경험이 많지 않아 황당한 실수를 했다’는 말도 나왔죠.”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성공한 실수’였다. 당시 ‘살아있는 권력’이었던 현철씨를 본격적으로 수사할 수 있는 추진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 『현철씨 사법처리 궁극목표 ▼
다시 수사 관계자의 설명.
“현철씨의 2천억원 리베이트 의혹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바람에 현철씨 수사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감히 누구도 외압을 가할 생각을 못했죠. 사방이 적(敵)인 상황에서 수사를 할 수 있는 힘을 여론으로부터 얻게 한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3월24일. 드디어 심재륜 신임중수부장이 부임했다. 심중수부장은 전국 각지의 내로라하는 특별수사 전문검사들을 모아 ‘드림팀’을 구성했다.
그러나 드림팀의 행보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여론은 매일 수사성과를 재촉하고 있었고 권력 핵심과 검찰 상부에서도 “(비리혐의가) 안나오면 없는 것 아니냐”는 압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시간이 필요했다. 심중수부장이 꾀를 냈다. 한보사건에 연루된 정치인들을 하나하나 소환하면서 시간을 벌기로 한 것.
심고검장의 회고.
“새로 구성된 수사팀의 사명은 누가 뭐래도 현철씨에 대한 사법처리였습니다. 정치인 수사도 물론 중요했지만 국민이 원하는 수사의 본류는 그것이 아니었죠. 그래서 한보사건 1차 수사결과를 바탕으로 33명의 수사대상 정치인 명단을 작성해 차근차근 조사했습니다.”
정치인 수사는 한달 가량 계속됐다. 은행장들에 대한 소환도 이어졌다. 이과정에서 심중수부장이 은행장 처벌과 관련해 사표를 내는 위기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위기는 “둥지가 흔들리면 알이 깨진다”는 수사검사들의 설득으로 일단락됐다.
그 사이 ‘드림팀’은 현철씨에 대한 자금추적을 계속했고 4월 중순을 넘기며 드디어 수사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양기대·이수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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