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金賢哲)씨 사건의 주임검사를 맡은 이훈규(李勳圭)대검 중수3과장이 들어섰다.
이과장은 기다리고 있던 검찰 고위간부들 앞에서 커다란 흰 종이 두장을 펼쳐 보였다. ‘자금추적도Ⅰ’과 ‘자금추적도Ⅱ’였다.
3월 중순 수사에 착수한 이후 한달 동안의 자금추적 결과를 종합해 도표로 그린 것이었다.
가로3m 세로2m 크기의 흰 종이 위에 수십개의 원이 그려져 있었고 그 원안에는 금융기관 이름과 억대의 돈 액수가 적혀 있었다.
수십개의 원은 시냇물처럼 흘러 저수지로 모였다. 그리고는 다시 지류를 형성해 다른 원으로 흘러 나갔다.
자금의 최초 발원지는 현철씨의 측근인 ㈜심우 대표 박태중(朴泰重)씨의 개인 계좌. 1백32억원의 뭉칫돈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92년 대통령선거 당시 현철씨가 쓰다 남긴 대선자금 1백20억원에 박씨 개인의 사업자금 12억원이 합해진 것이었다.
이 돈은 93년 초부터 집중적으로 빠져나가 수십개의 가차명 계좌를 거쳐 드디어 두개의 큰 저수지로 흘러 들어갔다. 하나는 이성호(李晟豪)전대호건설 사장의 부친 이건(李鍵)전대호건설 회장 명의의 대신증권 계좌였다. 다른 하나는 외환은행 퇴계로지점의 ‘세기문화사’계좌였다.
‘세기문화사’는 안기부의 비공식 별칭. 이는 곧 김기섭(金己燮)전안기부 운영차장이 계좌를 관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전사장의 계좌에는 50억원이, 김전차장의 계좌에는 70억원이 입금됐다.
50억원은 곧 현금으로 인출돼 어디론가 사라졌고 70억원도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다.
▼ 「자금추적도」에 분위기 반전 ▼
‘자금추적도’는 여기까지 그려져 있었다. 이는 수사 검사들과 자금추적 전담 수사관들이 한달 동안 거의 밤을 새워가며 수백개의 은행 지점을 훑고 다니며 일궈낸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었다. 이과장은 이 작업을 아무도 모르게 했다. 당시 수사팀 실무자의 설명.
“4월 중순쯤으로 기억되는데 갑자기 이과장이 커다란 도화지를 준비하고 제도사를 부르라고 하더군요. 제도사는 둥그런 원과 선(線)만 그리고 나갔습니다. 그러더니 또 글씨 쓰는 사람을 따로 불렀습니다. 철저하게 분업을 시킨 것이죠. 아마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을 겁니다. 어느 누구도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을 거예요.”
‘자금추적도’는 비장의 카드였다. 도표를 본 검찰 간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탄성의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사실 이날 브리핑이 있기 전까지 현철씨 구속 가능성에 대해 검찰 내부에서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자금추적도’는 검찰의 이같은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검찰 수뇌부에서 이제 현철씨를 소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나 이과장은 “이것만으로는 안된다”고 대답했다. 이과장의 회고.
“당시 자금추적도에 나타난 상황만으로도 현철씨를 구속할 수 있었습니다. 자금추적도가 거의 완성되던 4월18일경 처음으로 조세포탈죄를 적용할 생각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개인비리가 안나오면 1백20억원 전부를 조세포탈로 걸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럴 경우 자금의 출처를 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나는 문민정부는 헌정 중단 없이 임기를 채워 제2의 민주정부를 창출하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대선자금은 건드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결국 더 수사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4월 말경 대선자금과는 별도로 현철씨의 개인비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금추적팀에서 이전사장 계좌에 현철씨의 고교선배인 두양그룹 김덕영(金德永)회장의 수표 1억5천만원이 꽂혀 있는 것을 찾아낸 것. 이 계좌는 사실상 현철씨가 자신의 개인계좌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이어 현철씨가 고교 동문기업인 등에게서 수십억원을 받은 사실도 확인됐다.
바로 김회장을 소환했다. 김회장은 “이성호사장에게 사업과 관련해 직접 준 것”이라고 둘러댔다.
수사팀은 또 별도의 정보수집을 통해 김기섭씨가 이전사장에게서 1억5천만원을 받은 사실을 알아냈다.
이제 모든 문제는 이전사장에게로 통하고 있었다. 이전사장을 소환하면 현철씨의 자금관리 내용과 개인비리, 그리고 김전차장의 비리까지도 모두 밝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전사장은 한보사건이 터진 직후인 97년 2월4일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출국한 뒤 귀국하지 않고 있었다.
수사팀은 이전사장을 귀국시키기로 했다. 수사팀은 개인비리 혐의로 이미 구속한 박태중씨를 구치소에서 소환, ‘자금추적도’를 보여주었다. 박씨는 거의 체념하는 표정이었다.
수사팀은 박씨에게 국제전화로 이전사장과 통화하게 했다. 이전사장은 현철씨와 마찬가지로 박씨와도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 박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성호야, 어쩔 수 없다. 들어와라.”
“들어갈 수 없어요.”
“네가 들어와야 일이 해결된다.”
박씨는 울먹이며 이전사장을 설득했다.
태평양 건너 들려오는 이전사장의 목소리에도 눈물이 배어 있었다. 당시 이전사장은 미국에서 팩시밀리로 국내신문을 받아보고 현지 텔레비전을 보며 화살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박씨의 설득은 별 소득이 없었다. 당시 검찰 주변에는 현철씨와 안기부에서 이전사장에게 귀국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전사장도 나중에 귀국한 뒤 “그쪽(현철씨쪽)에서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전사장의 부친과 막역한 사이로 검찰총장을 지낸 J씨도 “정치적으로 판단해 볼 때 이 사건은 제대로 수사가 이뤄질 것 같지 않다”며 귀국하지 말라는 뜻을 전달했다.
수사팀은 승부수를 던졌다. 먼저 국내에 남아 있는 이전사장 사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이전사장의 동생인 ㈜세미냉장 사장 이상호(李相豪)씨도 소환했다.
이전사장에게 “사람은 빠져나가도 돈은 못 빠져나간다”며 압박을 가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사팀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과장이 직접 나서서 “일본까지만 와라. 거기서 마음이 안내키면 다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일본까지는 와라. 거기서 대화하자”고 설득했다. 이과장의 회고.
“일본은 한국과 시차가 없습니다. 그가 일본에 오면 한국 소식을 더 리얼하게 체감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할 것으로 여겼던 겁니다.”
이 작전은 주효했다.
이전사장은 일본까지 왔고 다시 수사팀중 자신의 고교선배인 김준호(金俊鎬·현 해남지청장)검사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귀국할 뜻을 비쳤다.
심재륜(沈在淪·현 대구고검장) 당시 중수부장의 회고.
“이성호씨를 귀국시킨 것은 전적으로 이과장과 김검사의 공입니다. 당시 나는 이과장 등에게 이씨에게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했어요. 이씨가 귀국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공중에 떠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이과장 등은 이씨에게 ‘10개월 동안 현철씨를 지키고 전재산을 날릴거냐. 정권은 유한하고 검찰은 영원하다’며 압력을 넣었어요. 이씨도 한보그룹 정태수(鄭泰守)총회장의 전재산을 몰수한 수사팀의 ‘솜씨’를 알았기 때문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 『검찰은 나를 치지 못할 것』▼
5월10일 이전사장이 귀국했다. 이과장은 그가 귀국하자 약속대로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동생과 함께 하루를 묵게 해주었다.
다음날 검찰에 출두한 이전사장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이과장은 “비행기표 줄테니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전사장도 검찰이 자금추적 상황 등을 들이대며 추궁하자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현철씨를 부르는 일. 수사팀은 현철씨의 중학교 동창으로 박태중씨와 함께 ‘삼총사’로 불리던 Y씨에게 자금추적도를 보여주면서 협조를 요청했다.
Y씨는 검찰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제 다 끝났으니 검찰청으로 들어오라.(대선자금까지) 다 뒤지면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존경하는 아버지까지 다친다”는 내용이었다.
현철씨의 서울 구기동 집에 다녀온 Y씨가 전한 현철씨의 반응은 의외였다.
“대선자금은 양날의 칼이다. 대선자금은 우리의 약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검찰의 약점이기도 하다. 검찰은 절대 못한다”고 말하더라는 것.
수사팀은 다시 Y씨에게 “우리는 끝까지 간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와 대통령이 불행해질 수 있다. 결단을 내려라”고 전하게 했다.
이번에는 “검찰은 절대로 나를 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들어가지도 않지만 들어가더라도 말하지 않는다”는 현철씨의 답변이 Y씨를 통해 전달됐다.
이전사장도 귀국한 상황에서 검찰은 더이상 현철씨 소환을 늦출 이유가 없었다.
5월14일 주임검사인 이과장이 직접 현철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중수부 3과장입니다.”
현철씨 부인이 바로 알아듣고 현철씨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마음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마음 편히 먹고 내일 오후2시에 나오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더 이상 다른 말은 없었다.
〈이수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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