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후문 앞 국군중앙교회에서는 주일을 맞아 권영해(權寧海)장로의 국방부장관 취임을 축하하는 예배가 열렸다.
“주여, 일을 주십시오”로 시작된 권장관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졌다.
“이스라엘 민족은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영도로 애급의 40년 노예생활에서 탈출했습니다. 하나님은 김영삼(金泳三·YS)새대통령을 모세와 같은 지도자로 우리 민족에 보내주셨습니다. 나는 제사장 아론의 역할을 하겠습니다.”
권장관의 기도에 담긴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축하예배가 열린 8일 뒤인 3월8일. 박정희(朴正熙)정권 이래 군부내 핵심 사조직 ‘하나회’ 출신인 김진영(金振永)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徐完秀)기무사령관이 전격 경질됐다. 문민정부 군개혁의 서막이었다.
권장관은 일요예배에서 ‘32년 군사정권의 잔재를 혁파할 성전(聖戰)’을 예고한 셈이었다.
권씨는 김영삼정부에서 불과 10개월 동안 국방장관을 지냈다. 그러나 ‘신한국군 5년사(史)’에서 그 만큼 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문민정부 출범 직후 5개월 동안 질풍노도처럼 진행된 숙군(肅軍)작업은 권씨를 빼놓고는 얘기가 안될 정도. 그는 하나회 숙정과 율곡 및 진급인사비리 척결, 12·12 관련자 예편조치 등 ‘군부 대수술’을 집도했다.
93년12월 포탄도입 사기사건을 계기로 장관직에서 물러난 권씨는 1년만에 안기부장으로 권력 핵심에 복귀했다. 그 뒤에도 그의 시선은 국방부를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 군내 중평이다.
권씨가 안기부장으로 있던 시절 국방부 주변에서는 “사실상의 장관은 권부장이고 장관은 차관이다”는 자조적인 얘기가 나돌았다. 권씨가 ‘내곡동 MND(국방부장관)’ ‘군 대부(代父)’ ‘안보대통령’ 등으로 불린 것도 군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
당시 청와대 관계자 P씨의 회고.
“문민정부에서 권씨 만큼 대통령을 자주 만난 사람은 없습니다. 매주 목요일 안기부 ‘특상보고’를 위한 대통령과의 독대자리는 물론이고 일이 생길 때면 수시로 청와대에 들어왔습니다. 대통령과의 독대횟수가 영향력과 직결되는 것이 한국적 현실 아닙니까.”
권씨와 김전대통령의 인연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국방부 L장군은 권씨 부부가 주도면밀하게 YS에게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권씨는 국방부차관이었던 92년5월경 서울 가락동 Y아파트 이웃에 살던 Y예비역장군을 통해 김현철(金賢哲)씨의 장인인 롯데월드 김웅세(金雄世)사장을 알게 됐고 김사장이 YS진영에 그를 소개했다는 것이 군내 정설입니다. 이때를 전후해 국군중앙교회에 다니던 권씨의 부인이 YS부부가 다니던 충현교회로 옮겼습니다. 자연히 부인들 사이에 교분이 싹텄고 현철씨와의 만남도 그 무렵 시작됐습니다. 권씨가 YS를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93년1월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있었던 국방업무 보고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김대통령이 한창 조각(組閣)을 준비하고 있던 93년2월 중순. 국방부장관실 관계자가 국방부 3층 권차관실을 찾았다.
“차관님, 새 장관님이 오시면 업무보고도 해야하고 준비할게 많은데 어떻게 할까요?”
“글쎄, 뭐 준비할게…. 올 사람은 신경쓰지 말고 갈 사람이나 잘 챙겨주시오.”
권씨가 자신의 진로를 미리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권씨는 자신을 장관으로 발탁해준 김대통령에 대한 ‘외길 충성’을 주변에 과시하곤 했다.
“그분은 만날수록 어렵고 존경심이 우러난다. 과거 군출신 대통령들이 겉으로는 엄했지만 속으로는 후배들과 형 아우하던 것과는 다르다.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지만 어휘 하나하나에 엄청난 힘이 들어있다. 정치9단이라는데 정말 그분의 결단력과 돌파력은 대단하다.”
김대통령 역시 변함없는 신뢰로 그의 충성에 화답했다. 권장관은 93년7월 동생 영호(寧鎬)씨가 무기중개상에게서 5천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사표를 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사표를 수리하는 대신 권장관을 불렀다.
“동생과 관련한 도의적 문제는 사표제출로 마무리됐습니다. 현재 군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권장관의 위치를 바꿀 사안이 아닙니다. 더이상 문제삼지 않을테니 장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주세요.”
권씨가 김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문민정부와 ‘유시유종(有始有終)’할 수 있었던 배경을 군 정보소식통은 이렇게 설명했다.
“팽(烹)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김대통령이 왜 한번 낙마(落馬)한 권씨를 안기부장에 다시 기용했는지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인 한국야구위원회(KBO)총재 시절에도 군문제에 대한 조언을 이유로 대통령을 독대했습니다. 권씨는 ‘공작(工作)대학 모략(謀略)학과’ 출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절묘한 처세술을 구사했습니다. 탁월한 언변과 업무처리 능력으로 김대통령과 현철씨를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정치생리와 권력핵심의 의중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문민정부 첫 조각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할 때 전격단행된 군 개혁작업과 96년4월 총선 직전에 이뤄진 북한군의 판문점 투입사건 처리, 97년 한보비리 청문회 당시 현철씨를 비호한 일 등을 보십시오. 특히 안기부장 시절 현철씨에게는 청와대 보고직전 군관련 정보를 미리 제공해 돈독한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양호(李養鎬)전국방장관이 권씨와의 치열한 군권다툼에서 밀려난 것도 그의 처세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장관은 김대통령과 현철씨를 만나면 지루한 군인사 얘기만 했지만 권씨는 군내의 굵직한 현안들을 얘기함으로써 신뢰를 얻었습니다.”
권씨가 김대통령을 사로잡은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진 일화 하나.
93년 10월1일 문민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계룡대에서 건군 45돌 국군의 날 행사가 열렸다.
행사가 끝난 뒤 권장관은 군수뇌부가 배석한 가운데 전군을 대표해 김대통령에게 군개혁을 칭송하는 문구가 새겨진 ‘사인검(四寅劍)’을 증정했다.
사인검의 한쪽에는 ‘一揮英斷 掃非不正(일휘영단 소비부정·큰 영단을 내려 부정비리를 척결하다)’이란 글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하나회 제거로 군사정권의 잔재를 척결함으로써 문민정부의 정통을 굳건히 세웠다’는 뜻이었다.
다른쪽에는 전체 군장성을 상징하는 2백70여개의 별이 새겨졌다. 상어가죽으로 만든 칼집에는 봉황이 무궁화를 에워싼 대통령 휘장이 금박(金箔)으로 장식됐다.
사인검은 조선시대 12년만에 한번씩 돌아오는 ‘갑인년 갑인월 갑인일 갑인시’ 등 사인 연월일시에 왕권과 종묘수호를 위해 한자루만 제작해 임금에게 바친데서 유래했다.
권장관은 하나회 숙정작업 뒤 주요보직에 자신과 근무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주로 기용했다. 김동진(金東鎭)육참총장은 물론이고 J국방부합동조사단장 O장관보좌관 등이 대표적인 인물.
김총장은 권씨의 차관 시절 국방부 정책실장, J장군은 6사단장 시절 헌병대장, O준장은 90년 권씨를 국방부 기획관리실장으로 발탁한 ‘은인’ 오자복(吳滋福)전국방장관의 군단장 시절 비서실장이었다.
권장관은 군부실세로 떠오른 윤용남(尹龍男)3군사령관 도일규(都日圭)수방사령관 등을 휘하에 끌어들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군부를 재편했다. 이들은 이후 문민 군인사의 비판 대상이 된 ‘1·5(1사단 5군단)군맥’ ‘PK(부산 경남)인맥’을 형성해 나갔다.
권씨는 안기부장 재직시에도 군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군권장악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P군단장 국방부 P전중장 등은 그의 도움으로 진급혜택을 본 대표적인 장성들.
육군 A장군의 증언.
“권씨는 안기부장 재직시 문민군부에서 승승장구한 김동진합참의장(전국방장관) 윤용남육참총장(전합참의장) 도일규3군사령관(전육참총장) 등과 늘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군내에서는 이들을 일컬어 ‘신라의 달밤회’라고 불렀지요. 경주가 고향인 권안기부장이 이들과의 회식자리에서 ‘신라의 달밤’을 애창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 국군체육부대에서 주로 만났습니다.”
그는 또 전방 방문을 통해 국방장관이 흉내낼 수 없는 파격적인 위문금을 전달, 군의 대부로서의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다. 97년초 6사단과 5군단 위문에 나선 그는 3천만원이란 거금을 쾌척, “안기부장이 역시 세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황유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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