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선 고지에서 묵묵히 나라를 지키는 일에 전력하는 군인이 ‘신한국군의 바람직한 모습’이며….(중략)군도 새시대를 맞아 개혁과 화합을 지향하는 신한국 건설에 적극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
이틀 뒤인 3월5일 육사 제49기 졸업 및 임관식. 김대통령의 치사는 이틀 전 발언보다 의미심장한 문구를 담고 있었다.
“신임장교 여러분. 군인의 길은 개인의 영화보다는 국가를 위한 헌신의 길입니다.(중략)그러나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은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졸업식이 끝난 뒤 청와대로 돌아가는 대통령 전용차안. 김대통령은 동승한 청와대 고위 관계자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정치군인들 말이야.군에서 내보내야겠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예, 무슨 말씀이신지….(잠시 머뭇거리다)글쎄요. 딱히 정치군인이 누구라고 지목하기도 쉽지 않고…. 자칫 공연한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을까요. 잘못하면 군의 단합을 저해할 우려도 있고요.”
“그렇기도 하겠네.”
졸업식 치사와 차속의 대화는 군부에 몰아칠 태풍을 예고한 셈이었다. 사흘 뒤 김진영(金振永)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徐完秀)기무사령관이 전격 해임되면서 하나회 숙정의 막이 오른 것.
김대통령의 군개혁은 어떤 배경에서 이뤄진 것일까.
당시 정치권 인사와 군 관계자들은 사전시나리오설, 괘씸죄설, 개혁저항세력 제거설, 국면전환용 카드설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런 분석들은 나름대로 근거를 갖고 있다.
김대통령의 후보 시절 정치행정 개혁안을 입안했던 주돈식(朱燉植)전청와대정무수석은 “김대통령은 후보 시절 이미 숙군의 청사진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후보 시절 외국기자들이 ‘당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군세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고 묻자 ‘두고 보자’고 짧게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문민정부 출범 후 김대통령은 당시 기자회견을 회상하며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군부세력과 동거(同居)하든지 적정선에서 타협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문민정부의 힘을 과소평가하더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시 기자회견 때부터 숙군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말이었죠. 사실 김대통령은 87년 대선 때부터 12·12사태 피해자인 정승화(鄭昇和)전육참총장과 깊은 교분을 갖고 군내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또 후보 시절 사조직을 통해 군문제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박관용(朴寬用)전청와대비서실장도 “군문제에 대해 김대통령에게 조언해온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었다”며 “김대통령은 하나회 문제가 나오자 정확하게 해임대상자를 지목했다”고 밝혀 사전시나리오설을 뒷받침했다.
이와 관련된 군 정보소식통의 주목할 증언.
“김대통령의 군관련 사조직은 ‘100계획’이었습니다. 박전실장이 지적한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죠. 김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몇몇 전현직 군장성들로 구성된 ‘100계획’을 사실상 주도한 사람은 김현철(金賢哲)씨였습니다.
대선 직후 ‘100계획’ 멤버중 한사람이 현철씨를 통해 군개혁 프로그램을 당선자에게 보고했습니다. 김대통령은 이 보고서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 베개 밑에 넣어두고 탐독했다고 현철씨가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의 이어지는 증언.
“‘100계획’에서 올린 군부숙정 프로그램은 3단계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1단계는 6월 정기인사를 통해 하나회 실세들을 제거함으로써 문민정부를 위협할 정치세력화의 소지를 방지하는 것이었습니다.
2단계는 능력과 인품에 따른 공정한 인사였죠. 3단계로 군인사의 개방성이 확보되면 연말 인사를 통해 군내 단합에 주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밑그림에 불과했을 뿐 정교한 실천계획은 담고있지 않았습니다.
하나회 척결도 폐해가 심한 일부 정치군인만 솎아내는 것이었지 하나회 전체를 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여론에 민감한 김대통령이 지나치게 군을 정치에 이용했고 그 와중에 문민군부 신실세 그룹들의 군권장악 야심이 가세해 마녀사냥식 숙정이 이뤄진 것입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은 김대통령이 군부 물갈이를 통해 개혁저항세력들을 무력화하려 했으며 국면돌파용 성격도 있었다고 말했다.
93년 3월 초, 김대통령의 인기는 수직상승하고 있었지만 일부 청와대 참모와 각료들의 도덕성이 문제가 돼있었다.김대통령은 결국 취임 열하루만인 3월8일 부분개각을 단행했다. 그로서는 자존심이 적지않게 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날 함께 단행된 군수뇌부 개편작업이 개각에 쏠린 국민의 이목을 어느 정도 돌려놓은 셈이었다.
8일 언론사 사장들과의 청와대 오찬에서 김대통령은 “개혁을 하려면 역풍도 저항도 있게 마련인데 그런 조짐이 벌써 나타나고 있다”며 “신한국의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하는 꽃샘 추위가 아무리 매서워도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이경재(李敬在)공보수석은 “개혁을 추진하려는 새정부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고 방해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있다”며 “특정인에 대해 일반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의 상세한 내용이 제보되고 있다”고 말했다.
도덕성이 도마에 오른 일부 각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청와대측이 개혁저항세력의 조직적 반발 움직임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J수석비서관을 비롯해 K수석 H부총리와 H장관을 대상으로 한 악성루머들이 언론에 제보되거나 증권가에 퍼지고 있었던 것.
J전수석의 기억.
“수석으로 내정된지 이틀만에 증시에 루머가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각료나 청와대 수석에 대한 투서나 언론사 제보중에 사실로 드러난 것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가족들도 잘 모르는 ‘색깔’문제에 관한 투서와 소문을 이처럼 신속하게 퍼뜨릴 수 있는 곳은 정보기관밖에 없을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됐죠. 청와대 조사결과 유력한 혐의기관으로 기무사가 꼽혔습니다. 김대통령은 기무사가 자신의 측근들에 대한 사상적 흠집내기를 시도한 것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예비역 C장군은 괘씸죄설을 믿는다.
“서완수기무사령관은 92년 민자당 대선후보 경선 때 김대통령이 후보로 지명되는데 대해 부정적이었고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YS 불가론’을 폈습니다. 군부의 장래에 대한 불안과 일부 김대통령 주변인물들의 색깔이 불투명하다고 판단했던 탓이었죠. 그는 내심 군출신인 박태준(朴泰俊)민자당 최고위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기무사는 김대통령의 두 아들인 은철(恩哲)씨와 현철씨에 대한 병역문제도 조사했습니다.
92년 9월18일 노대통령은 민자당 탈당 및 중립선언을 한 뒤 기무사에 여당후보를 은밀히 지원하라는 지침을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방향을 잃은 기무사가 김영삼후보에 대한 중립 또는 소극적인 협조로 일관하다 화를 입은 겁니다. 특히 기무사는 권영해국방차관이 김대통령 취임 전 상도동에 출입하는 사실을 포착하고 그의 재산형성 비리를 수집해 보고하려 한 적도 있었습니다. 김대통령은 이를 군부의 음해공작으로 받아들였죠.”
C장군은 김진영육참총장도 괘씸죄에 걸렸다고 설명했다.
김대통령은 후보시절인 92년 7월31일 대전에 간 길에 군의 새 메카인 계룡대에서 조깅을 함으로써 예비통수권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싶어했다.
김총장은 김후보가 뛰는 앞줄에 여군하사들을 몇명 배치하는 등 꽤 세심한 배려를 했지만 자신은 조깅 대신 교회의 아침기도에 참석했다.
“김총장은 김대통령과 지나치게 밀착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김대중(金大中) 정주영(鄭周永)후보가 어떻게 나올지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죠. 87년 대선 때는 노태우후보 지원을 위해 군인 부인들까지 동원됐었는데 김대통령 진영으로서는 대단히 섭섭했을 겁니다.”
이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김대통령은 취임 전 군개혁을 위한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가 정권 초기 복합적인 상황이 전개되자 전격적인 군인사를 단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있는 해석일 것 같다.
〈황유성기자〉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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