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는 뜻밖에 ‘사조직 금지 입법 추진’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골자는 ‘군내에서 사조직을 결성하거나 가입할 경우 2년 이하의 금고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군인사법에 신설, 정기국회에 상정하겠다’는 것.
국방부를 출입하는 기자들은 물론 군 관계자들도 사조직에 대한 느닷없는 강경조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나회 숙정작업이 끝난지 이미 3년이 지난데다 군부도 완전히 재편된 상황이어서 별다른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국방부 인사당국자는 “앞으로 하나회와 같은 유사 조직의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진짜 배경은 따로 있었다.
이장관 측근의 설명.
“이장관이 96년 5월경 군내 정보조직을 통해 ‘만나회’라는 이름의 새로운 사조직에 관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육군의 새로운 실세로 떠오른 인물 중 상당수가 만나회에 가입했다는 충격적인 보고였습니다. 이장관은 이 조직을 그대로 두면 하나회와 같은 폐해가 재발하고 인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사조직 금지입법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해안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이 일어나고 이장관이 해임되면서 입법화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장관이 입수한 만나회에 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보고 채널이 기무사와 같은 공식 정보기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7년 말 대통령선거를 전후해 군 내부에는 만나회 회원 명단이 적힌 문서가 나돌기 시작했다. 처음에 2,3종이었던 만나회 관련 문서는 기수별로 2,3명씩 이름을 달리하며 유사 문서를 생산해 나중에는 8종까지 늘어났다. 문민군부의 실세 장군이 거의 명단에 들어 있어 유인물의 신뢰도에 의문이 제기됐지만 군심은 크게 동요했다.
기무사가 조사에 들어간 가운데 1월말 일부 주간지는 ‘만나회와 하나회의 복수혈전’이란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당시 도일규(都日圭)육군참모총장은 헌병 범죄수사실에 수사를 지시, 하나회 출신 모대령을 유력한 제보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기무사와 육군의 조사내용은 군수뇌부에만 보고됐을 뿐 공개되지 않았다.
만나회란 명칭이 공개된 것은 93년 5월 강창성(姜昌成)의원이 국회 국방위에서 “육사 21기부터 33기까지 1백7명이 만나회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계승해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 최초였다.
강전의원은 최근 “군이 대단히 예민하게 생각하는 문제인 만큼 지금으로서는 밝히고 싶지 않다”며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과연 만나회는 존재하는 것일까.
특히 전 현직 하나회 출신 장교들은 “만나회는 틀림없이 있으며 하나회를 친 조직이 만나회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만나회와 관련돼 거론되는 장교들은 “정권 교체기에 하나회측에서 내놓은 음해성 문서일 뿐”이라며 일축하고 있다.
만나회의 존재 여부는 하나회처럼 당국이 공식 수사를 거쳐 공개한 일이 없어 그 진위는 베일에 가려 있다. 현재까지 국방부와 육군의 공식입장은 “군내 새로운 사조직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회측이 주장하는 만나회의 실체는 이렇다.
“만나회라는 명칭은 모세가 애급을 탈출한 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나눠 먹었던 음식을 뜻하는 만나에서 따온 것이다. 6공시절 과거 하나회로부터 소외됐던 L전육참총장과 K전군사령관이 육사 29기까지의 후배들을 대상으로 만나회를 구성했다. 이어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에서 근무한 육사30기부터 37기까지의 장교모임인 ‘나눔회’를 흡수해 조직을 강화했다.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권영해(權寧海)장관이 임명되자 이들은 권장관에게 접근했고 하나회 제거라는 공동의 이해 때문에 상호협조관계가 이뤄졌다. 만나회가 하나회쪽에 노출된 것은 조급하게 조직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입회 대상자가 하나회인줄 모르고 선정했다가 나중에 탈락된 경우가 많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하나회측 인사들은 “만나회와 나눔회가 각각 별개의 조직으로 형성돼오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뒤 하나회가 제거되면서 양조직이 통합됐다”며 “만나회와도 친분이 있는 나눔회 핵심인 P대령이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만나회는 대체로 4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쳤다는 것이 하나회측 설명.
“1단계는 87년 6월 이전 노태우(盧泰愚)대통령 집권시 군부통치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조직 구상 및 준비, 전두환(全斗煥)계열에 대한 대응이 주목표였다. 2단계는 87∼89년 6공 출범과 함께 9·9인맥(9공수여단과 9사단장을 지낸 노씨와의 근무인연 장교)을 중용해 조직결성을 완료했다. 3단계는 89∼93년 L총장 취임으로 세력을 정착, 확산시켰다. 4단계는 93년 3월 하나회 제거와 김현철(金賢哲)씨와의 접속으로 전성기를 구축했다. 만나회 회원은 29기 이전은 기별로 5∼9명씩, 30기 이후는 기별로 15명 안팎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93년 12월 하나회 출신 이병태(李炳台)장관 등장과 96년 이양호장관의 견제로 일단 위기에 봉착했다.”
하나회측은 “6공 중반에 만나회는 청와대와 국방부를 비롯, 3사(三司)로 불리는 수방사 특전사 기무사 등 수도권 주요부대와 육군본부 요직에 회원들을 포진하면서 세력을 급격히 확장해 나갔다”고 주장했다.
하나회 출신 Q예비역소장의 주장.
“의심이 많았던 노태우씨는 처음에는 만나회를 묵인했으나 지나치게 세력이 커지자 견제방안을 생각했습니다. 노씨가 L총장을 전역시키고 직계인 또다른 L대장 대신 전두환씨 계열인 김진영(金振永)장군을 총장으로 기용한 배경입니다. 그 대신 만나회인 K장군을 육참차장으로 임명해 김총장을 역으로 견제토록 한거죠. 6공 말기에 만나회가 잠시 주춤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민정부 초기에 하나회를 제거하면서 다시 군내 주도권을 잡는 듯했으나 K장군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전역함으로써 일시 중심을 잃게 된 겁니다.”
만나회 주도자들이 모두 전역하고 부회장격이었던 P장군도 조직에서 탈퇴함으로써 잠시 위축되는 듯했으나 또다른 K장군이 이들을 이끌어나가면서 다시 세를 회복, 군권을 장악했다는 것이 하나회측 주장이다.
만나회는 김현철씨와 권영해장관 김동진(金東鎭)육참총장 등 문민군부 실세들에게 접근했으며 이들도 하나회 척결과정에서 만나회를 이용하는 등 ‘공생관계’를 이뤘다는 것이다.
Q예비역소장의 계속되는 주장.
“문민정부에서 만나회가 하나회처럼 명확한 실체를 보이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중간보스격인 현역 K장군의 계급이 낮아 세력을 눈에 띄게 확산하기 곤란했고 권영해 김동진씨 윤용남(尹龍男)육참총장 등이 인사 때 자기 사람도 심었기 때문에 서로의 세력이 뒤섞이면서 하나회와 달리 구심점이 흐트러진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에 대해 만나회 일원으로 거론된 인사들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반박했다.
L전총장은 “처음 듣는 말로 전혀 근거가 없는 소문”이라며 “내가 과거 현역시절에 사조직을 만들면 안된다고 주장했던 사람인데 아마 누군가가 억측으로 만든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P대령은 “숙정된 하나회원들이 조직대 조직간의 파워게임으로 몰고가거나 함께 공멸하겠다는 음모”라며 “만나회가 있다면 윗사람이 바뀌어도 밑에 조직이 있기 때문에 한 두사람 외에는 바뀌지 않는데 알다시피 김동진 윤용남 도일규총장 시절에 그 사람들 개성대로 인사를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K장군은 “만나회가 마치 있는 것처럼 쓰지 말고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신문에 공개해 백일하에 밝혀야 한다”며 “내가 거쳐온 군경력으로 봐도 사조직에 가입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 아니냐”고 부인했다.
또 K전사령관은 “‘가공의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며 “모종의 음해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국방부에서 공식조사해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다만 우리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후배 기수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없다”고 여운을 남겼다.
문제는 만나회와 관련된 소문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퍼져 군내 불신이 증폭되고 단합과 사기에 저해 요소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군수뇌부가 조속히 소문의 진상을 규명해 이같은 부작용을 막아야 한다는 군내 여론이 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황유성기자〉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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