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 76]「新재벌정책」의 허상

  • 입력 1998년 9월 21일 19시 13분


96년 5월 이른바 문민정부의 ‘신재벌 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었다.

당시의 신재벌 정책이란 한마디로 재벌의 문어발을 잘라버리겠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재계에서 비판이 터져나왔다.

“세계화 시대에 크다는 이유로 기업을 규제하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선진국에도 없는 이상한 제도는 없어져야 합니다.”

이에 대해 정부쪽은 ‘고추장론’이란 논리로 반격하고 나섰다.

“고추장에 대한 식품위생 규제는 한국에만 있습니다. 왜냐? 고추장은 한국사람만 먹으니까. 재벌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총수 한 사람이 50∼60개 기업의 경영권을 거머쥐고 전횡하는 재벌이 한국외에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고추장론이 맞을까, 세계화론이 맞을까?

재벌은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었지만 한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유명해져 영국 옥스퍼드사전에도 ‘Chaebol’이라는 단어가 올라 있을 정도.

재벌과 권력의 관계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각∼하!”

96년 1월31일 청와대 만찬장. 만찬이 시작된 지 10여분만에 나타난 모그룹 K회장이 청와대 만찬장에 들어서면서 크게 외쳤다. 허리는 깊숙이 굽혀졌다.

이날 만찬은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 비자금사건으로 위축된 재계를 위로하기 위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30대 재벌총수들을 초청해 베푼 것이었다.

K회장이 나타날 때까지 재벌총수들은 빈자리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덩달아 초조해 했다. 그러나 대통령을 기다리게 한 민망함을 ‘죽을 죄’로 얼버무린 K회장의 넉살에 폭소가 터졌다.

“괜찮아요, 죽을 죄는 무슨….”

김대통령의 말에 만찬장을 짓누르던 긴장은 슬며시 풀려버렸다. 참석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은대구구이와 수육을 안주로 포도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85년 해체된 국제그룹의 양정모(梁正模)회장은 정반대의 경우. 전두환(全斗煥)당시 대통령이 총수들을 불렀지만 양회장이 눈 때문에 그만 늦고 말았다. 양회장의 ‘지각’이 국제그룹 해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재계에서는 정설로 통한다.

이들 에피소드는 집권자의 심기는 터럭만큼도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재벌총수들의 ‘경영 수칙 제1조’를 곱씹어 보게 한다.

문민정부의 재벌정책은 무서웠다.

92년 말 대선 직후 김영삼당선자는 전경련에서 당선 축하인사를 하겠다며 면담을 요청하자 거절했다. 대신 중소기협중앙회의 요청은 받아들여 재계에 충격을 줬다. 곧이어 D그룹 총수 P씨는 몇몇 그룹에서 정치자금을 갹출해 전달하려다가 면박만 당했다.

김대통령은 취임 후 “국제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재벌조직이 효율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대주주가 지분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다” “5% 지분만으로도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해 재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 김대통령은 재벌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측근들은 전했다.

문민정권의 ‘재벌 손보기’ 일선에는 한이헌(韓利憲)공정거래위원장이 배치됐다.

93년 3월 전경련이 산하에 ‘기업자율조정위원회’를 새로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룹간 중복투자와 과당경쟁을 피하고 중소기업이 국민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다하도록 대기업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출범한다’는 이 조직은 재계가 새 정부에 던지는 추파였다.

그러나 며칠 뒤 한위원장이 청천벽력같은 통보를 했다.

“기업자율조정위는 공정거래법에 어긋납니다. 담합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법을 적용하겠습니다.”

전경련은 구상을 재빨리 철회했다.

공정위의 행보는 빨랐다. 30대 그룹 내부거래 실사, 은행권 수수료 담합인상 제재, 포철을 30대 그룹 지정에 포함, 위장 계열사 색출 등이 속속 집행됐다.

93년 4월 ‘정말 무서운 얘기’가 나왔다.

공정위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의뢰해 만든 신경제 정책자료에 ‘기업분할 및 투자회수 명령제 도입 검토’란 내용이 포함된 것. ‘재벌해체 명령을 내리겠다’는 뜻이었다.

파문이 커지자 김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재벌을 인위적으로 해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수습해야 할 지경이었다.

93년 경기가 너무 나빠 한동안 주춤하던 재벌 길들이기는 94년 여름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자 재개됐다. 정부가 출자한도 40%를 25%로 낮추는 공정거래법 개정을 추진한 것.

전경련은 “공정거래법은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는 것보다 공정경쟁 체제 구축을 통한 경쟁촉진 쪽에 초점을 맞춰 개정돼야 한다”며 반발했다.

재정경제원 차관으로 자리를 옮긴 한이헌씨가 94년 8월 조규하(曺圭河)전경련 부회장을 조용히 불렀다.

“조부회장님, 공정거래법을 읽어본 일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래요?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제1조. 이 법은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고 독과점 폐해를 시정하며 중소기업을 육성하고 소비자를 보호해 건전하고 균형된 국민경제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차관이 다시 물었다.

“어때요. 공정거래법이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도록 돼있지요?”

“아, …예.”

갑자기 한차관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런데도 전경련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법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까, 의도적으로 무시하겠다는 겁니까?”

졸지에 호통을 듣고 돌아온 조부회장은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이제 재계는 정부에 가련하게 보여 동정을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한이헌씨가 94년 10월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자 재계는 바짝 긴장했다.

95년 2월 김대통령은 신경제회의에서 “대기업은 선단(船團)식 경영으로 중소기업의 입지를 좁히지 말라”고 말했다. 곧 이어 세계화시대의 재벌정책이 가닥을 잡아갔다.

최종현(崔鍾賢)전경련 회장이 반발했고 95년 6월 이건희(李健熙)삼성 회장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비판하는 사건도 있었지만 곧 수습됐다.

이때 한이헌수석과 강봉균(康奉均)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다.

95년 6월경 세계화추진위원회 추진기획단장을 맡은 강실장이 재벌정책을 가다듬기 시작한 것. 교수 공인회계사 등을 동원해 비밀작업팀을 만들어 그룹회장실 폐지, 사외이사 및 감사제 도입 등을 연구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한수석이 강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강실장이 뭔데 재벌정책을 다룹니까? 그게 총리실 일입니까?”

“총리실이 아니라 세계화추진위에서 하려는 것입니다. 세계화를 하려면 재벌문제도 국제규범에 맞게 처리돼야 할 것 아닙니까?”

“쓸데없는 일 하지 마세요. 재벌문제는 경제문제입니다. 경제수석실에서 알아서 할테니 총리실에서는 그만 손 떼세요.”

한수석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었다.강실장은 작업팀에 해산을 선언했다.

“그만둡시다. 재벌수술이라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청와대가 적극 도와줘도 될까말까한데 발목을 잡고 나서니 될 게 뭐 있겠소.”

한수석은 재벌의 비리나 경제력 집중 등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규제완화 시장원리 등에는 매우 개방적인 성향이었다.

이같은 개방성은 경제수석에 취임한 뒤 여지없이 드러났다. 세계화 깃발과 한수석의 영향력 아래 삼성은 자동차를 얻었고 현대의 금융제재는 풀렸다(문민비화 38,39회 참조).

이들 사건을 두고 일각에서는 “한씨가 너무 빨리 정치인으로 변신해 친(親)재벌 입장으로 돌아섰다”고 비판하고 있다.

한수석과 함께 김대통령도 급속히 친재벌화해 95년 7월 30대 그룹 총수를 청와대로 초청한 데 이어 정몽준(鄭夢準) 정몽헌(鄭夢憲)씨를 모두 사면복권했다.

그러나 96년 4월 총선 이후 신재벌정책이 다시 부상하면서 ‘고추장론’이 등장했던 것.

96년 8월 한승수(韓昇洙)부총리로 경제팀이 바뀌면서 다시 유화책이 나왔다. 수출이 안되고 경상수지 적자가 쌓이는 등 경기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지지부진했던 재벌정책은 97년 초 한보그룹이 흔들리면서 더욱 물러졌다. 뉴코아 진로 해태 대농 기아가 줄줄이 쓰러지는 부도홍수를 맞자 정책은 아예 실종됐다. 문민정부는 개별사안에 대해서는 재벌에 무서운 존재였다. 그러나 문민정부의 재벌정책은 도무지 갈팡질팡이었다.

문민정부 5년 동안 거론됐던 경제력 집중 완화도, 소유경영 개선도, 업종 전문화도, 계열사 정리도 모두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문민정부에 이어 현 정부에 몸담고 있는 한 경제관료의 평가.

“문민정부 5년간 재벌정책은 없었다. 일관된 것이 있었다면 김대통령 개인이 재벌의 돈을 받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철학이 실종된 정권의 한계였다.”

〈허승호기자〉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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