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 83]결국 IMF로(上)

  • 입력 1998년 11월 9일 19시 28분


기아그룹이 사실상 부도나고 한달 쯤 지난 97년 8월10일 서울 명동의 은행회관. 15개 시중은행 국제담당 임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심야회의가 극비리에 열렸다.

“정부는 절대로 금융기관의 외채를 대신 갚아주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그러니 방법들을 얘기해 보세요.”

회의를 소집한 원봉희(元鳳喜) 재정경제원 금융총괄심의관이 임원들을 다그치듯 주문했다.

임원들은 식은 땀만 흘릴 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금융기관의 달러 조달창구는 7월 중순 기아사태 이후 꽉 막혀 있었다.

금융기관들은 동분서주하며 달러를 구걸했지만 새로 달러를 빌려주는 전주(錢主)는 없었다. 게다가 만기가 돌아온 채무는 재계약도 되지 않았다. ‘무조건 갚으라’는 닦달만 있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난 뒤 원심의관은 ‘협박’을 철회했다.

8월12일 7개 은행과 10개 종합금융사가 만기가 도래한 상환분에 대해 “못갚겠다”며 배짱을 부리기 시작한 것. ‘외화부도’를 선언한 셈이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맞은 재경원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날 밤12시 한국은행은 일단 10억달러를 풀어 부도를 막아주었다. 대신에 재경원은 관련 금융기관에 함구령을 내렸다.

“아무도 달러를 꿔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정부가 발표한 영문으로 된 보도자료를 들고 다니며 설득을 했겠습니까.”(제일은행 관계자)

보도자료란 정부가 8월25일 발표한 대책을 말한다. ‘금융기관이 외국에서 빌린 돈을 못갚으면 정부가 대신 갚아주겠다’는 내용의 극약처방이었다.

그러나 이는 정말 ‘극약’으로 작용해 미국뉴욕의월가(街)에서는‘한국 정부가 통화위기를 공식인정했다’고 받아들였다.

강경식(姜慶植)부총리겸 재경원장관은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8월18일 강부총리의 정부 과천청사내 집무실로 이윤재(李允宰)경제정책국장(현 청와대 경제비서관)이 들어갔다.

“태국 바트화가 폭락한 데다 국내 은행의 외화사정이 몹시 어렵습니다. 8월12일 일부 은행이 외화부도를 낸 것도 그렇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전에도 파산지경에 이른 적이 몇번 있었소. 아직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인도가 그 정도로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대비책은 마련하되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마세요.”

당시 금융가에는 ‘9월 금융대란설’이 흉흉하게 나돌았다. 그러나 다행히 9월이 넘어가도록 대란은 없었다. 강부총리는 득의만만했다.

그러나 10월 하순 동남아 시장에서 ‘특A급’ 태풍이 북상했다. 홍콩사태가 터진 것. 10월23일 하루 동안 홍콩의 주가지수인 항셍지수가 10.4%나 폭락했다.

“모니터에서 항셍지수 그래프가 곤두박질치는 것을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죠.”(김석동·金錫東 당시 재경원 외화자금과장)

아시아 전체의 환율과 주가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고혈압 증세가 있던 김과장은 이날부터 사무실에 우황청심원을 사다놓고 지냈다.

10월 27일 오전7시반 청와대에서는 김영삼(金泳三)대통령 주재로 확대경제장관회의가 열렸다. 한보사태 이후 9개월만에 열린 확대회의였다.

채권시장 개방, 외국인 주식보유 한도 확대 등 이날 마련된 대책은 모두 외자유입에 초점이 맞춰졌다. 정부가 마련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외자 유인책이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이나 다른 장관들의 문제의식은 아직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 재경원 K국장의 설명.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외환위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없었다. 대통령은 정치인답게 주가 하락만 걱정했고, 장관들은 예산철이어서 그랬는지 ‘어떻게 하면 이 틈에 예산을 더 따낼까’에 대해서만 궁리하는 것 같았다. 하긴 이미 시간이 너무 늦어버려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위기의식이 공유되지 않은 진짜 이유는 재경원이 문제를 꼭꼭 숨기며 혼자 고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제투자자들은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0월28일 미국의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는 한 통의 보고서를 띄웠다.

‘긴급:아시아물(物)을 즉각 팔아치우라.’

보고서 내용이 국내시장에 알려지면서 이날 종합주가지수는 35 포인트나 빠져 500선이 붕괴됐다. 이날 한국은행은 환율 개입을 포기했고 사상 처음으로 외환거래가 중단되기도 했다.

10월 29일 외자유치 대책이 발표됐지만 30일 외국인 투자자는 주식을 1천3백49억원어치나 팔아버렸다. 하루 최대 규모의 순매도였다.

그러나 강부총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태연했다.

10월28일 김대통령은 답답한 심정으로 TV 저녁뉴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강부총리가 국회에서 “한국경제는 펀더멘털이 튼튼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답변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흥분한 김대통령이 수화기를 들었다. 김인호(金仁浩) 경제수석 비서관이 전화를 받았다.

“경제가 이 모양인데 부총리는 아직도 ‘펀더멘털’ 타령이가. 말조심 좀 시키라.”

강부총리에 대한 김대통령의 신뢰가 무너진 것은 이미 오래전이었다. 강부총리는 10월 20일로 예정됐던 강연을 취소해야 했다. ‘열린 경제로 가기 위한 국가과제’란 제목으로 9월부터 전국 순회강연을 해왔으나 김대통령이 ‘한가한 소리 좀 그만하라’며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11월 5일 경제전문 통신사인 블룸버그통신에 뜬 기사가 또한번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한국의 가용외환 보유고는 20억달러에 불과하다. 시중은행들이 해외지점에 꾸어주거나 선물환 투자로 물려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같은 날 홍콩 페레그린증권이 낸 한국 보고서는 이렇게 끝맺고 있다.

“Get out of Korea, now(한국을 탈출하라, 즉시).”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 등 세계의 주요 신문이 블룸버그의 기사를 인용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한술 더 떠 “연말까지 만기도래하는 외채가 8백억달러에 달한다”고 근거를 알 수 없는 내용까지 보도했다.

11월5일에야 김대통령은 강부총리로부터 ‘최악의 경우 IMF에 갈 수도 있다’는 첫 보고를 받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대통령의 관심은 주가폭락 등 정치적이고 대중적인 문제에 쏠려 있었다.

이때쯤 윤진식(尹鎭植)청와대 경제비서관이 청주고 선배인 홍재형(洪在馨)전 경제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가부도가 날 지경인데 대통령에게 정직하게 보고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직보할 수도 없고….”

“급한데 보고라인이 어디 있어. 자네가 해.”

“대통령이 형님은 믿잖습니까. 형님이 좀 해주십시오.”

우여곡절 끝에 10일 오후 김대통령과 홍전부총리의 통화가 이뤄졌다.

“각하, 돈줄이 꽉 막혔습니다. 미국 일본이 돈을 안주면 즉시 IMF에 가야 합니다.”

김대통령은 깜짝 놀랐다. 이날 오후9시반경 김대통령은 이경식(李經植)한국은행 총재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경제에 대한 걱정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던 이총재가 위스키 두 잔을 마시고 막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이었다.

“이총재, 갱제(경제)가 이래 가지고 되겠나?”

“각하 큰일입니다. 주가나 환율은 아무 문제도 안됩니다. 나라가 부도나기 직전입니다.”

부도라는 말에 김대통령은 뜨끔했던지 “그라먼 우에 하노”라고 물었다.

“미국은 돈 안줍니다. IMF에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날 김대통령은 ‘설마 IMF에 가기야…’에서 ‘IMF에 가야 한다’로 생각을 바꿨다. 매일 이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이전총재의 기억.

“김대통령은 외환보유고가 얼마나 되는지 물으셨다. 심각하냐,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 부도나면 어떻게 되느냐는 등의 질문이었다. 설명을 들은 뒤 대통령은 ‘앞으로는 외환보유고를 금융기관 부도막는 일 외에는 절대 쓰지 말라. 또 재경원 말을 듣지 말고 대통령의 지시만 받으라’는 말씀을 여러번 했습니다.”

11월14일 아침 강부총리의 청와대 보고가 있었다.

“미국 등 우방국 정부로부터 돈을 빌려보겠습니다. 만약 실패하면 IMF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IMF로 가면 언론은 ‘문민경제는 IMF로 마감됐다’고 보도할 것입니다.”

김대통령의 답변은 단호했다.

“나라가 결딴날 판국에 치적이 다 뭐꼬. IMF로 가라, 그마!”

대통령의 결심이 훨씬 빨랐던 것이다. 깜짝 놀란 강부총리가 방에서 나와 김인호수석에게 말했다.

“대통령께서 다른 사람에게서 무슨 말을 들으신 것 같아요.”

시장이 중병에 걸린 지 몇달이 지난 뒤에야 강부총리는 위기를 실감했다. 그리고 김대통령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다시 한달이 지나서였다. 그것도 비공식 라인을 통해서였다.

한국경제의 IMF행은 그렇게 진행됐다.

〈허승호·이용재기자〉tigera@donga.com

▼ 환란 일지 ▼

△97.1.23〓한보철강 부도

△3∼6월〓삼미 진로 뉴코아 등 연쇄부도

△7.2〓태국 바트화 폭락

△7.15〓기아 사실상 부도, 협조융자 신청

△8.14〓인도네시아 루피아화 폭락

△8.25〓정부, 금융기관 대외채무 지급보증 약속

△10.23〓홍콩 증시 폭락

△10.24〓산업은행이 기아그룹에 출자키로 함

△11.14〓김영삼대통령 IMF행 결심

△11.16〓미셸 캉드쉬 IMF총재 극비 방한, 구제금융 논의

△11.19〓강경식부총리 경질

△11.21〓IMF 구제금융 신청 공식 발표

△12.3〓임창열부총리, ‘대기성 차관 제공에 대한 양해각서’에 서명

△12.5〓IMF 1차 지원금 56억달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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