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사례들〓정사장뿐만이 아니다. 사업을 하는 K씨(50)도 최근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민주당 관계자들에게 털어놓았다. K씨는 사업상 상의할 일이 있어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청와대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한 적이 있다. 전화를 했더니 이 직원이 ‘O시 O분에 청와대 앞에 차를 대달라’고 해 청와대 앞에 갔다. 이 직원은 말쑥한 양복 차림에 청와대 출입증까지 달고 나타났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기능직 직원이었다.
노태우(盧泰愚)정권 때는 이런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모 방송국 인사 때 ‘청와대 관계자’로부터 ‘모씨는 우리 사람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전화가 방송국에 걸려왔다. 이 관계자는 청와대 구내 전화번호까지 알려줬다. 방송국 감사실 직원이 그 번호로 전화를 해보니 이 관계자가 전화를 받았다. 아무래도 수상쩍어 다른 경로로 알아보니 그 전화번호는 ‘보일러실’이었고, 전화 당사자는 ‘보일러공’이었다.
청와대 직원이 직접 개입된 비리도 적지 않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8월에 터진 포항제철 납품 청탁 사기사건은 청와대 민원비서관실의 김모 행정관이 직접 개입한 경우. 김씨는 포철 납품업자인 문모씨로부터 6000여만원의 돈을 받고 유상부(劉常夫)포철회장을 직접 만나 문씨의 납품계약 연장을 추진하다 구속됐다.
▽청와대에 대한 인식〓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청와대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도 ‘청와대를 통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인식은 여전히 우리의 의식에 깊게 스며들어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래의 부조리요 적폐이지만 국민의 정부 들어서도 이런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윤규씨처럼 기능직 직원들까지도 그 틈새를 비집고 위세를 부린다. 포철 납품 청탁사건에 개입된 김모비서관도 밖에서는 ‘국장님’으로 통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최근 “청와대에 들어간다니까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건설업을 하는 고교동창으로부터 ‘한 달 술값 정도는 대주겠다’는 전화가 걸려와 거절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청와대 직원들의 직위는 밖에서 ‘업그레이드’ 되는 경우가 많다. 웬만하면 과장 국장, 또는 비서관으로 통용된다.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주위에서 ‘비서관’으로 높여 불러주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 역시 왜곡된 인식의 산물로 탈선을 부채질한다.
▼원인과 처방은▼
기본 원인은 우리 정치문화의 기저에 배어있는 △권력과 권위에 대한 맹종 △일부 부도덕한 위정자와 관리들 △청와대의 권력화를 꼽을 수 있다.
한국사회병리학연구소 백상창(白尙昌)소장은 “60∼70년대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겪으면서 청와대는 다원론적인 권력분권보다는 행정부, 입법부, 시민사회를 넘어서는 초월적 권력을 상징하는 현실적 권력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백소장은 “민주화와 시민사회의 성숙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는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에 이르러서도 ‘청와대에 줄이 닿으면 무엇이든 해결된다’는 일반인들의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런 분석은 과거 정권에도 적용되는 것이지만 문제는 ‘국민의 정부’, ‘작은 정부’를 자처하면서 청와대의 위상과 기구축소를 단행했다는 이 정부에서도 이런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역시 △감독자의 관리능력 부재 △직원 충원의 연고주의 △청와대 운영의 비공개성으로 인한 폐해 등을 그 원인으로 추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한 관계자는 “과거 정권 때는 더했다는 식의 변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청와대는 비서관에서 기능직 직원들에 이르기까지 보다 엄격하고 철저하게 감시, 관리해야만 외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청와대 근무경험이 있는 또 다른 관계자는 “비서관이나 직원 충원 때 혹 연줄을 앞세우게 되면 자체 감시기능이 둔해져 도덕적 불감증에 빠지기 쉽다”고 지적하고 “청와대 운영도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제와 기능, 기본활동과 임무 등은 인터넷 등을 이용해 분명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윤영찬·하태원기자>yyc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