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국회 법사위 분위기는 전날 상황과 같았다. 민주당 조순형(趙舜衡) 천정배(千正培)의원이 ‘정치자금 포함’을 고집했고, 두 의원 설득에 실패한 민주당 지도부는 한나라당에 표결처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당론 통일을 요구하며 사실상 회기 내 처리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오후 들어서 한나라당 법사위원들이 이회창(李會昌)총재를 면담, “정치자금을 포함시키자”고 건의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되는 듯했다. 시민단체와 여론의 압력에 고민하던 이총재는 “이 법안은 모든 국민이 원하고 우리 당도 필요하다고 보고 있지 않느냐”며 “정치자금만 제외할 명분이 없다”고 동의했다. 한나라당 법사위원들은 방침 변경 사실을 즉각 민주당 이상수(李相洙)총무에게 통보했다.
한나라당에 허를 찔린 이총무는 대구에 있는 김중권(金重權)대표와 전화통화를 한 뒤 ‘정치자금 포함’ 방침을 수용했다. 더 이상 버틸 경우 ‘반(反) 개혁적’이라는 비난을 뒤집어 쓸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3당 총무회담에서 ‘정치자금 포함’ 방침이 합의되자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의 여야 위원들은 논란 끝에 정치자금을 규제대상에 포함시킨 수정안에 합의했다.이 과정에서 한나라당 정인봉(鄭寅鳳)의원 등은 “법사위원들이 어떻게 법체계에도 맞지 않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느냐”며 끝까지 반대했다.
이어 열린 한나라당 의총에서 다시 제동이 걸렸다. 의원들은 “야당 의원들 계좌 추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방법을 보완해야 한다”“계좌 추적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충분한 법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의원들의 반발이 계속되자 한나라당은 민주당측에 ‘뇌물 및 정치자금의 불법의혹이 있는 거래는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가 접수되는 동시에 당사자에게 통보, 소명기회를 줘야한다’는 재수정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이는 범죄근절을 위한 것이 아니라 범죄인 보호를 위한 특례법”이라며 한나라당의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협상이 결렬됐다. 여론에 떼밀려 여야가 어쩔 수 없이 ‘정치자금 포함’에 합의했지만 뒷감당을 하지 못해 이 문제는 사실상 원점으로 회귀한 셈이 됐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