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부 "상황 달라졌다"▼
정부는 그 이유에 대해 △왜곡의 주체 △한일관계의 수준 △일본 정부의 태도 등이 모두 달라 그 때처럼 ‘강경책’을 쓰기 어렵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 국민적 분노와 우려를 가라앉힐 수 있을까.
정부 당국자들은 82, 86년에는 정부 대 정부 차원의 싸움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특히 82년에는 왜곡의 주체가 일본 문부성이었고, 한일관계도 지금처럼 ‘파트너십’ 운운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전두환(全斗煥)정부로서는 한판 승부를 벌일 만했다는 것.
1982, 86년과 2001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 비교 | |||
1982년 | 1986년 5월 | 2001년 | |
왜곡 내용 | ―일본 문부성, 고교용 역사교과서 검정시 원본의 ‘침략’을 ‘진출’로 수정(6월) | ―한일합병 강제성 부인하고 일제 억압 삭제한 ‘신편일본사’ 검정합격(5월) | ―자국중심주의적 사관으로 과거잘못 미화한 우익교과서 검정통과(4월) |
파문 시점 | 검정결과 공개 이후 | 검정결과 공개 이후 | 검정과정부터 논란 |
정부 대응 | ―외교문제로 제기(일본 해명사절 거부, 한일 실무회담 수석대표 교체 등) ―수정 강력히 요청 | ―성의있는 시정조치 강력 촉구 ―구체적 시정안 작성해 일측에 전달 | ―유감 성명 발표 ―교과서 왜곡 정밀 검토 ―‘대책반’ 구성 |
일본 반응 | ―일본 문부상 담화 발표(새 검정기준 마련 등) | ―문제 교과서 4차례 재수정 지시 | ―재수정 불가 방침 |
결과 | ―문제 교과서를 새 기준에 따라 수정(83년 6월) | ―문제 교과서를 우리측 시정안 등에 따라 시정(86년7월) | ? |
일본 정부도 한국과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 당황해 각료들 간에도 이 문제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는 등 ‘적전분열(敵前分裂)’ 양상을 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 문부상은 82년 11월 “‘국제이해와 국제협조 배려’라는 검정기준을 신설하고 그 기준을 조기에 적용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한 발 물러섰다.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당시 정부로선 나름대로 선전했던 것.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무엇보다 ‘예고된 파문’이라는 특징이 있다. 문제의 교과서들은 검정 신청 때부터 논란이 있었고, 일본 정부는 그런 논란 속에서도 검정을 해줬다. 이는 곧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처음부터 확고했음을 뜻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정부의 한 당국자는 “일 문부과학성이 문제의 교과서를 137군데나 수정하면서까지 통과시켰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고위당국자도 6일 “국민 감정은 알지만 이번에는 82, 86년 때처럼 ‘밀어붙이기’식 대응으로 통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서울대 윤영관(尹永寬·외교학)교수는 “‘21세기 새로운 한일관계’는 김대중(金大中)정부의 대표적 외교성과 중 하나”라며 “그런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이번 사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정부의 딜레마인 것 같다”고 말했다.
윤교수는 특히 대북 경협과 공조에는 일본의 역할도 중요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가 더 어렵고, 이점이 또한 80년대와 다른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부형권기자>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