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 법조계의 역사를 보아도 재야정신이 가장 투철했을 때가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다.
역대 대한변협회장 가운데 재야 정신이 가장 투철했던 변호사로는 13대(1964년)와 17대(1968년) 회장을 지낸 고 이병린(李丙璘) 변호사가 꼽힌다. 그는 4·19혁명 직후 서울지검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도 받았으나 거절하고 40년 이상 재야 변호사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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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변호사는 역대 변협회장 가운데 최초로 구속되는 기록을 세웠다. 64년 6·3사태 당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비상계엄하에서 무더기로 구속되자 이 변호사는 변협 명의로 ‘인권에 관한 건의서’를 작성해 비상계엄 해제와 6·3사태 관련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변호사는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가 한달여 만에 계엄 해제로 석방됐다. 이 변호사는 두 번째 변협회장 임기가 끝난 뒤인 69년 9월 동료 변호사 30여명과 함께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3선개헌을 반대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변호사는 74년 다시 구속됐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위원으로 있으면서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주회복 국민선언문’에 서명한 직후였다. 당시 서울지검의 H검사는 이 변호사에 대해 ‘간통’ 혐의로 비밀리에 영장을 청구했고 서울형사지법 P부장판사는 영장을 그대로 발부했다. 이 변호사는 한달여 만에 석방됐으나 그 사건 이후 건강이 악화됐고 결국 경북 김천으로 낙향해 시골변호사로 쓸쓸하게 말년을 보냈다.
9대(1960년) 회장이었던 신태악(辛泰嶽) 변호사도 회장 재임 당시 자유당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는 성명을 여러 차례 발표했으며 69년 10월 박 대통령의 3선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개헌안 무효 선언서를 발표했다.
변협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33대(85∼86년) 김은호(金殷鎬) 회장과 34대(87∼88년) 문인구(文仁龜) 회장 재임 때다. 김 회장은 5공화국 군사정권에 맞서 수시로 비판적인 성명을 발표했으며 협회 차원에서 시국 공안사건 변론에 앞장섰다. 특히 86년 말 민청련의장 김근태(金槿泰·현 민주당 최고위원)씨의 고문사건에 대한 재정신청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게 하는 데 앞장섰다. 문 회장도 87년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 사건 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주도하고 그 해 4월 전두환(全斗煥) 정권의 ‘호헌(護憲) 선언’에 맞서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성명을 잇따라 내놓아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변협의 대정부 비판은 많이 줄었다. 최근의 변협 간부들은 “시대 상황이 달라진 탓”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곤 했다. 그러나 변호사들은 “시대 상황이 아무리 달라져도 재야 법조계가 권력과 긴장하고 정권을 비판할 일은 언제나 있다”고 말한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