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그게 이렇군요/변협과 역대 정권의 관계]권력의 횡포에 항거 앞장

  • 입력 2001년 7월 25일 18시 29분


박재승(朴在承) 서울변호사회 회장은 취임 초기인 올 3월 변호사의 ‘재야(在野)정신’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서울변호사회가 발행하는 월간 ‘시민과 변호사’ 3월호 권두시론에서 “변호사는 재야정신의 속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며 “권력에의 항거 정신이야말로 재야정신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재야 법조계의 역사를 보아도 재야정신이 가장 투철했을 때가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다.

역대 대한변협회장 가운데 재야 정신이 가장 투철했던 변호사로는 13대(1964년)와 17대(1968년) 회장을 지낸 고 이병린(李丙璘) 변호사가 꼽힌다. 그는 4·19혁명 직후 서울지검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도 받았으나 거절하고 40년 이상 재야 변호사로 일관했다.

▼관련기사▼

- 법조계 '변협결의문' 이견

이 변호사는 역대 변협회장 가운데 최초로 구속되는 기록을 세웠다. 64년 6·3사태 당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비상계엄하에서 무더기로 구속되자 이 변호사는 변협 명의로 ‘인권에 관한 건의서’를 작성해 비상계엄 해제와 6·3사태 관련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변호사는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가 한달여 만에 계엄 해제로 석방됐다. 이 변호사는 두 번째 변협회장 임기가 끝난 뒤인 69년 9월 동료 변호사 30여명과 함께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3선개헌을 반대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변호사는 74년 다시 구속됐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위원으로 있으면서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주회복 국민선언문’에 서명한 직후였다. 당시 서울지검의 H검사는 이 변호사에 대해 ‘간통’ 혐의로 비밀리에 영장을 청구했고 서울형사지법 P부장판사는 영장을 그대로 발부했다. 이 변호사는 한달여 만에 석방됐으나 그 사건 이후 건강이 악화됐고 결국 경북 김천으로 낙향해 시골변호사로 쓸쓸하게 말년을 보냈다.

9대(1960년) 회장이었던 신태악(辛泰嶽) 변호사도 회장 재임 당시 자유당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는 성명을 여러 차례 발표했으며 69년 10월 박 대통령의 3선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개헌안 무효 선언서를 발표했다.

변협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33대(85∼86년) 김은호(金殷鎬) 회장과 34대(87∼88년) 문인구(文仁龜) 회장 재임 때다. 김 회장은 5공화국 군사정권에 맞서 수시로 비판적인 성명을 발표했으며 협회 차원에서 시국 공안사건 변론에 앞장섰다. 특히 86년 말 민청련의장 김근태(金槿泰·현 민주당 최고위원)씨의 고문사건에 대한 재정신청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게 하는 데 앞장섰다. 문 회장도 87년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 사건 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주도하고 그 해 4월 전두환(全斗煥) 정권의 ‘호헌(護憲) 선언’에 맞서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성명을 잇따라 내놓아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변협의 대정부 비판은 많이 줄었다. 최근의 변협 간부들은 “시대 상황이 달라진 탓”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곤 했다. 그러나 변호사들은 “시대 상황이 아무리 달라져도 재야 법조계가 권력과 긴장하고 정권을 비판할 일은 언제나 있다”고 말한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