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그게 이렇군요]정권말 공직사회 줄대기

  • 입력 2002년 10월 7일 18시 51분


내부정부-도청자료 들고이黨 저黨에 '기웃기웃'
내부정부-도청자료 들고
이黨 저黨에 '기웃기웃'
대통령선거가 70여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정부 공직자들의 ‘정치권 줄대기’가 노골화되고 있다. 주로 ‘정보제공’을 매개로 이뤄지고 있는 최근의 정치권 줄대기는 대개 한나라당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정치권 줄을 찾아라”〓국가정보원 간부 L씨는 “요즘 국정원은 출신지역간 알력이 꽤 있다. 영남 출신 직원들은 주로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 의원에게 줄을 대고 있다. 정 의원이 오히려 ‘이젠 그만 와도 된다’고 만류할 정도라고 한다”고 말했다.

박지원(朴智元) 대통령비서실장과 요시다 다케시(吉田猛) 신일본산업 사장의 전화 통화, 한화 김승연(金昇淵) 회장과 청와대 K 비서관의 전화 통화 내용을 담은 ‘국정원 도청자료’가 정 의원에게 넘어간 것이 줄대기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특정지역출신 "몸피하자"
해외 연수 신청 크게 늘어

국정원은 공식적으로는 이런 도청자료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지만 박 실장이 요시다 사장과의 통화 사실을 시인한 것을 비롯해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정 의원이 폭로한 내용은 도청자료에 바탕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반론이다. 국정원도 내부적으로 자체 감찰팀을 동원해 도청자료 유출 장본인을 색출하는 작업에 착수했으나 현재까지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에 줄을 대는 사람 중엔 호남 출신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호남 출신 정부투자기관장이 최근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 쪽에 “돕고 싶다”며 문을 두드린 사실이 전해져 청와대 고위층으로부터 엄중 경고를 받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남 출신 국정원 간부 K씨는 “호남 출신으로 김대중(金大中) 정부에서 혜택을 본 공직자 중에서도 한나라당에 줄을 대는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한나라당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이 후보의 한 특보는 “최근 호남 출신의 경찰 고위 간부가 은밀하게 ‘꼭 알려야 할 정보가 있다’면서 접근해 왔다”며 “그러나 밀려드는 정보가 워낙 많아 알았다고만 한 뒤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일반 부처 공무원의 경우는 ‘자료설명’ 등을 이유로 한나라당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한나라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각 부처 국장급 실무자들이 당의 정책위원회에 와서 보고하거나 브리핑하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 당이 발표하는 분야별 공약에는 이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되기도 한다. 전 같으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고 말했다.

"새정부서 감점요인 될라"
주요보직 거부…閑職자원

▽소신 이적〓아예 현직에서 사표를 내고 특정후보 진영을 찾아가는 ‘소신파’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청와대에선 공보수석비서관실 행정관 안연길(安然吉)씨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실 행정관 이종상(李宗相)씨가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 진영으로 가기 위해 사표를 냈다.

이에 앞서 9월10일에는 정책기획수석비서관실 행정관 김운형(金運亨)씨가 사표를 내고 정몽준(鄭夢準) 의원 진영으로 이적했다.

국정원의 K씨는 “국정원 내에서는 현 정부 들어 현직에서 두 단계 승진하는 등 크게 덕을 본 간부들을 중심으로 노 후보와 정 의원측에 기대를 거는 사람도 상당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고 귀띔했다.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 정권과 거리두기〓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직업 공무원들이 청와대 파견을 기피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된 현상”이라며 “심지어 어떤 서기관은 해당부처 장관의 추천을 받아 청와대 파견을 통보받자 ‘나는 연수를 가야 한다. 이번에는 곤란하니 다음에 불러달라’며 노골적으로 거부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대통령 임기말 청와대 근무가 퇴임하는 정부와 정치적 운명을 같이한 인물로 각인돼 새 정부 들어 인사에 불리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청와대 근무만 기피의 대상은 아니다. 일반 정부 부처에서도 정치권과 접촉이 많고, 그만큼 출세가 보장돼 온 요직이 최근에는 기피 대상이 되고 있다. 단적으로 청와대 하명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청 특수수사과장 자리는 정권에 줄을 댈 수 있는 핵심 요직으로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최규선(崔圭善) 게이트’에 연루돼 최성규(崔成奎) 전 과장이 해외로 도피하자 후임자 인선 과정에서 일부 후보자들이 고사해 인선이 한달 이상 지연되기도 했다.

국방대학원 파견, 부처 내 연구직종 근무, 해외 연수 등 이른바 ‘한직’을 자원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국정원 관계자는 “일부 호남 출신 공직자들 사이에 ‘정권 교체기에는 몸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는 식의 사고가 퍼지고 있다”며 “국정원에서 최근 해외연수자를 선발했는데, 20여명 선발인원 가운데 특정 지역 출신이 반이나 돼 내부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이와 함께 호남 출신의 일부 공직자들은 자기 지역의 예산을 미리 확보하는 등 정권교체에 대비해 정지작업을 벌이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호남 출신의 한 정부부처 공무원은 “혹시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 호남 쪽 예산이 대폭 삭감될 가능성에 대비해 예산삭감이 불가능하도록 각종 계속성 사업 예산을 집중 편성하는 등 구조적인 견제장치를 마련했다”고 털어놨다.

▽정부의 시각〓공직사회의 이 같은 뒤숭숭한 움직임에 대해 청와대는 국무총리실을 중심으로 진행될 공직기강특별 점검작업을 통해 ‘정치권 줄대기’를 엄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임기말 권력누수가 5년 단임제의 대통령제 아래서 피할 수 없는 숙명적 악순환이란 체념론도 적지 않다. 더욱이 지금의 청와대가 ‘대북 비밀지원설’ 등 각종 의혹의 중심에 서있는 만큼 ‘엄정한 기강’을 세우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정부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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