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한의 여론조사▼
단일화 여론조사에 앞서 설문문항 등을 꼼꼼히 따져보지 않은 데다 설문 후 ‘검증’ 절차도 생략했던 데 대한 후회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실제 정 대표 주변에서는 여론조사 직전 민주당과 노 후보 지지자들의 결집력 등을 들어 “조사결과가 왜곡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으나 당시에는 묵살당했다. 결국 조사결과가 패배로 나타난 뒤에야 정 대표의 측근들은 “프로 집단에 아마추어가 당했다”고 억울해 했다.
한 당직자는 “후보가 안 된다는 생각을 꿈에도 해보지 못한 정 대표가 뜻밖의 여론조사 결과를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고통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커지는 상실감▼
정 대표의 복잡한 심사는 최근 인사에서도 묻어난다. 1일 민주당과의 공동선대위원장에 조남풍(趙南豊) 예비역대장과 최운지(崔雲芝) 전 의원을, 비서실장에 10년이상 자신을 보좌해온 이달희(李達熙) 보좌관을 임명한 반면 1, 2차 후보단일화 협상 주역이었던 이철(李哲) 김민석(金民錫) 전 의원을 선거대책특보로 사실상 2선 후퇴시킨 것이 단적인 예다. 당내에서는 정 대표의 ‘심중’을 잘 아는 인물들을 핵심에 포진시킨 것은 당분간 그의 정치행보가 ‘응축형’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는 최근 당외 인사들과의 접촉도 피하고 있다. 최근 한 민주당 중진의원의 회동 제의를 거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조 반대론▼
정 대표의 소극적 행보에는 공조에 반대하는 주변의 의견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대표측 핵심관계자들 가운데는 단일화 이후 한나라당측으로부터 “정 대표가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돕거나 최소한 중립지대에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설득을 받은 인사들이 적지 않다는 후문이다. 통합21의 한 관계자는 “이러저러한 논리를 내세워 정 대표와 현대 가문의 장래를 위해 이념과 노선이 다른 노 후보를 돕지 말라는 한나라당 관계자들의 ‘각개격파’ 작업이 시도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한 정 대표를 도왔던 지인들 가운데도 “그냥 중립을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주문이 없지 않다. 일각에서는 현대 가문의 형제기업들로부터 ‘중립 요청’이 있었다는 소문마저 나돌고 있다. 정 대표는 이와 관련, 최근 회의석상에서 “현대나 기업 친구들이 ‘한나라당 도와라’, ‘가만히 있어라’, ‘노 후보를 도와라’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는데 현대중공업은 설사 이회창 후보가 집권해도 망하게 할 수 없는 회사다”며 복잡한 심경의 일단을 피력했다.
▼꿈★은…▼
정 대표는 최근 핵심당직자들에게 “무(無)에서 새로 시작하겠다”며 ‘재기 의지’를 다지는 얘기를 했다.
정 대표측 한 관계자도 “92년 대선에서 실패한 정 대표의 선친(정주영·鄭周永 전 현대 명예회장)이 판을 정리한 뒤 현대가 무사했느냐. 오히려 겁먹고 물러서면 더욱 밟히는 게 정글의 생존 법칙이다”고 정 대표의 심경을 대변했다.
이와 관련해 정 대표는 자신이 ‘몽니를 부리는 듯’이 비치는 데 대해 몹시 화를 내고 있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당의 한 핵심관계자는 “정 대표도 이미 ‘대통령 병’에 걸렸다. 5년 뒤를 내다보고 있다. 확고한 입지 마련을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국민 앞에 분명히 부각시켜야 하고,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입장이 다른 노 후보의 정책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분권형 대통령제에 이어 대북정책 조율을 내세우고 있는 데 바로 이런 복안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4일 인천지역 유세에서 “나보고 외교를 모른다고 하는데 내가 왜 모르겠느냐. 이제 정몽준 후보와 손잡았고 정 후보는 세계를 아는, 외교에 대해서도 많은 인맥을 가진 사람으로 둘이서 서로 협력하고 의논해 국정을 끌어가면 외교도, 새로운 정치도 문제가 없다”고 구애 발언을 했다.
노 후보는 이날 저녁 MBC 방송연설에서도 “정 대표와 하나가 됐다. 앞으로 정 대표와 손잡고 국민이 원하는 새 정치를 한번 해보겠다”고 정 대표를 치켜세웠다.
그러나 정 대표측 관계자들은 “노 후보가 전날 TV 합동토론에서 ‘단일화합의는 본래 정치개혁이 대상이었고, 정책조율은 검토중’이라며 정책공조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던 점에 비추어 노 후보의 새 발언에 대한 진의 파악이 우선돼야 한다”며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민주당측은 5일이라도 양자회동을 갖고 공조를 서두르자는 입장이지만 이런 정 대표측 반응에 비추어 성사 여부는 아직도 유동적이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