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패배 후 한동안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진 듯하던 한나라당에 ‘밑으로부터의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386세대의 본격적인 정치권 진출 시도와 미디어홍보 전략의 대대적 개편, 사무처 직원들의 분위기 쇄신 움직임이 새 물결의 핵심이다. 이런 변화의 징후들은 소속 의원들이 당 개혁안을 놓고 이전투구식의 ‘잿밥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과 대비돼 더욱 돋보인다는 평가다.
▽386세대의 출사표=386세대 보좌관과 비서관들은 요즘 늘 국회수첩을 갖고 다닌다.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수첩을 꺼내 ‘영남권 의원들의 나이’를 보여주며 물갈이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서다. “151명의 의원 가운데 60세 이상이 81명, 1940년 이전 출생자(64세 이상)는 51명이다”며 숫자까지 꿰고 있다.
특히 4·24 재·보선 고양 덕양갑에 67세의 이국헌(李國憲) 전 의원이 공천되자 당직자들 중 젊은 출마 준비자들은 이번주 중으로 모임을 갖고 “젊은 사람 목소리를 분명히 내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견해를 중앙당에 전달하기로 했다. 비록 공천에는 탈락했지만 손범규 변호사(37)가 이 전 의원과 막판까지 각축을 벌이면서 ‘젊은 세대에 기회를 줘야 한다’는 공감대가 당내에 확산되고 있는 데 힘을 얻은 것이다.
사무처 직원들과 이회창(李會昌) 전 대통령후보 캠프의 젊은 보좌역들이 내년 총선에 대비해 ‘출사(出師)’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19일 당무회의에서 대통령후보비서실 정용기(鄭容基·40) 부국장이 대덕지구당위원장에, 부천소사지구당 임해규(林亥奎·42) 사무국장이 경기 부천 원미갑지구당위원장에 임명된 것은 당 지도부도 변화의 흐름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송태영 부대변인, 권영진 김해수 이명우 차명진 전 후보보좌역 등 386세대들도 내년 총선에 도전장을 던질 태세다.
그러나 386세대의 정치권 진출 시도가 그리 녹록한 것만은 아니다. 60대 의원들의 반발과 중진 현역의원의 프리미엄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움직임이 노골화되자 60대 의원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한 중진 의원은 “그동안 다음 총선 때는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주라고 권유하던 아내도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청산대상이 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한번 더 하라고 부추긴다”고 말했다. 김용갑(金容甲) 의원은 “89년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중간평가 거부에 반발해 총무처장관까지 던졌다”며 “선배 의원들이 명예롭게 물러날 기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세했다.
‘100% 지역구 공천경선’ 제도를 도입한다 하더라도 결코 386세대에 유리하지만은 않다는 지적이다. 보수적 색채가 강한 영남권에선 중진급 현역의원의 프리미엄을 넘어서기가 어렵기 때문. K의원실의 K보좌관은 “유권자 반응과 중앙당 차원의 개혁의식을 적절히 조화시킨 공천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미디어전략 강화▼
▽미디어 전쟁에서 이기자=‘감성적인 홍보전략 부재’를 대선 패배의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는 한나라당은 미디어 홍보전략의 대대적인 개편에 들어갔다.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당원들에게 ‘PR마인드’를 심어주는 것.
이를 위해 한나라당은 26일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정치인 브랜딩 전략’이라는 PR 특강을 준비중이다. 홍보국의 신덕순 부장은 “광고회사 간부를 초빙해 민주당의 대선 CF와 우리 당의 대선 CF를 비교분석하고 지난 대선 때 우리 당이 미디어 전쟁에서 진 원인 등을 집중 분석할 것”이라며 “한 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특강을 열어 당원들에게 PR마인드의 중요성을 심어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이버공간의 개편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대선 때는 외부기관에 한나라당 사이트의 제작과 관리를 의뢰했으나 이제는 당이 자체적으로 사이트 제작과 관리를 맡기로 했다. 7명인 사이트 관리 인원도 20명까지 늘리고 예산도 대선 때의 10배까지 늘리는 등 공세적인 투자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차기 지도부 직선을 위한 정당 사상 최초의 당원명부 확인작업도 미디어 홍보와 무관치 않다. 신뢰할 수 있는 당원명부를 확보하게 되면 기업의 데이터베이스(DB) 마케팅기법을 각종 선거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똘똘 뭉친 사무처▼
▽사무처가 일어선다=당의 기간요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무처 직원들도 ‘다시 5년’ 뒤를 기약하며 ‘와신상담’하고 있다. 350여명의 사무처 직원들은 대선 패배 후 침체된 당 분위기를 추스르고 5년 뒤 대선을 기약하기 위한 ‘재충전 이벤트’ 개발에 부심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사 내 5대의 승강기와 각 층 화장실에 걸린 옛 저명인사들의 격언을 써 놓은 소형사진 액자.
‘외부조건이 변하기를 기다린다면,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의 절반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디어도어 루빈’ ‘최후의 승리는 인내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인내하는 데서 운명이 좌우되고 성공이 따르게 된다―나폴레옹’
한 직원은 “승강기를 탈 때마다 한번씩 읽어보는 격언들이 작은 희망과 일에 대한 의욕을 불어넣고 있다”며 “다시 5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게 우리 모두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리 지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사무처 직원들의 ‘재기 움직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월에는 사무처 직원들을 중심으로 사무처협의회를 출범시켰고 2월에는 한나라당 천안연수원에서 당의 단합과 진로 모색을 위한 워크숍을 개최하기도 했다. 22일에는 관악산에서 단합등산대회를 가졌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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