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 유출은 검찰이 여권에 ‘보고’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검찰’이 아니라 ‘권력의 검찰’이라는 사실이 단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법조인과 시민단체들은 “안기부 돈 선거자금 유입사건 못지 않게 권력과 검찰의 ‘내통’ 역시 중대한 문제”라며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내통’의 정황〓9일자 조간신문에 보도된 자료에 따르면 돈을 받은 정치인은 모두 180명이며 이들에게 건네진 돈은 433억원. 9일 검찰이 공식적으로 확인한 185명, 463억원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 수치여서 최근 수사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검찰은 일단 이 명단의 내용이 세세한 점에서 일부 사실과 다른 내용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수사 내용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정치인 185명의 실명과 수수 액수까지 정확히 맞춘 점에 비춰 검찰의 수사 상황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명단의 유출에 대해 여권이 의혹을 받는 이유는 지금까지 언론에 흘려온 각종 수사 상황 발언과 ‘일맥상통’한 정황 때문.
민주당 김중권(金重權)대표는 검찰이 공개수사를 시작한 지 이틀 뒤인 5일 “검찰이 돈을 받은 사람의 리스트도 다 있다고 한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또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8일 오전 박순용(朴舜用)검찰총장의 기자회견 전 “검찰이 정치권의 공방과 관련해 입장을 발표한다”며 사전 교감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명단 유출 공방〓검찰과 여권은 명단 유출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했다. 검찰은 “수사팀에서 수사 결과를 정리해 가지고는 있었으나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상부에 보고하거나 정치권에 전달한 사실은 없다”고 주장했다.
또 청와대나 민주당도 “우리는 절대 아니다”고 펄쩍 뛰고 있다. 정가에서는 검찰이 청와대로 보고한 내용이 여권 핵심 인사들에게 전해졌고 이 과정에서 흘렀나왔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점〓분명한 사실은 이번 명단 유출의 주범이 정치권이라 하더라도 그 진원지는 검찰이었다는 점. 검찰은 그동안 돈 받은 정치인에 대해 공식적으로 “범죄 혐의가 확정되지 않는 한 명단을 일절 밝힐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해 왔다. 이런 원칙을 ‘정치권’에 대해서는 예외로 해 왔다면 이는 검찰의 자기 모순이라는 지적이다.
국민에게는 ‘원칙 고수’를 주장하면서 ‘권력의 귀’에는 귀엣말을 속삭여 온 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검찰은 정권 또는 정치권과 관련된 민감한 수사의 경우 관련자 소환은 물론 자세한 수사 진행 상황에 대해 청와대에 보고를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스스로도 이같은 관행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검찰 관계자는 “중요 인물을 소환하거나 사법 처리하는 경우 사후에 알릴 수는 있으나 수사 진행 상황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차병직(車炳直)변호사는 “한마디로 검찰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며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라며 철저한 ‘진상 조사’를 요구했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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