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 대통령당선자는 비상경제대책위 활동보고를 마치고 돌아서는 김용환(金龍煥) 비상경제대책위원장에게 “김 위원장은 저와 같이 정부에 들어가 일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나 김용환은 “저는 당에 남아서 할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의 ‘할 일’이란 내각제 추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DJ가 거듭 재정경제부장관을 맡아달라는 취지의 요청을 했으나 김용환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제가 아는 몇 사람의 보필을 받아 직접 경제를 챙기십시오”라며 한 장의 메모지를 품안에서 꺼냈다.
DJP 공조 일지 | |
96.5.4 | DJP 국회 회동, 공조 첫 논의 |
97.11.3 | DJP 회동, 15대 대선후보 단일화 합의 |
97.12.18 | 김대중 후보, 대통령 당선 |
98.2.24 | 김대중 당선자, 김종필 국무총리 지명 |
98.12 | 정계개편설 대두, 2여 내각제 개헌 갈등 |
99.1.5 | DJP 청와대 회동, 상호신뢰 확인 |
99.4.15 | DJP+자민련 박태준 총재+국민회의 김영배 총재권한대행 4인 회동, 8월 말까지 내각제 논의 유보 및 공동여당 합당 불가 합의 |
99.7.17 | DJP 워커힐호텔 회동, 합당 논의 |
99.7.21 | DJT 회동, 내각제 개헌유보 합의 |
99.12.22 | DJP 회동, 합당불가 및 공조 합의 |
2000.1.11 | 김 총리 자민련 복귀, 박태준 총리 지명, 이한동 자민련 입당 및 총재권한대행 취임 |
2000.1.20 | 새천년민주당 창당, 내각제 강령 배제 |
2000.2.24 | 자민련 이한동 총재, 공동여당 포기 선언 |
2000.4.13 | 자민련 4·13총선 참패 |
2000.5.22 | 이한동 총리 지명 |
2000.12.30 | 민주당 의원 3명 자민련 입당 |
2001.1.8 | DJP 청와대 회동에서 공조복원 선언 |
2001.4.9 | 민주당 자민련 민국당 3당 정책연합 출범 |
2001.9.3 |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건의안 한나라당 자민련 찬성으로 국회 가결. DJP 공조 붕괴 |
입각대상으로 추천하려고 생각했던 자신의 후배 경제관료들의 명단이었다. 명단에는 이규성(李揆成) 이헌재(李憲宰) 진념(陳稔) 전 재정경제부장관 등 6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DJ 정부의 경제부처 요직을 맡았다. 이처럼 김용환이 DJ의 입각 제의를 거부한 배경에는 DJ의 업무스타일에 대한 회의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측근의 말.
“김용환은 비대위원장으로 가까이서 DJ를 지켜본 결과 DJ가 매사를 스스로 꼼꼼히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체질이라고 판단했다. 김용환 자신도 일단 어떤 일을 맡으면 전권(全權)을 맡아야만 하는 성격이어서 입각을 할 경우 대통령과 부딪히는 상황이 초래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DJ의 한 핵심참모는 “재경부의 기능이 신설될 예정이었던 금융감독위원회에 분산돼 재경부 장관의 권한이 대폭 축소된 데다 부총리 직급도 하향된 점 등을 감안해 결국 그 자리가 김용환의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아무튼 DJ정부의 초대 재경부 장관직은 이규성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이규성으로 낙착되는 과정도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DJ의 한 참모는 “이규성은 DJ와 별다른 면식이 없었다. 여기에다 국민회의 내에서는 과거 투신사 부실화의 책임이 있는 ‘구시대 인물’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에 대한 부정적 의견도 많았다. 이 때문에 김 대통령은 이규성 대신 임창열(林昌烈)을 재기용해 경제정책의 연속성을 기하려 했으나 자민련측의 압력에 밀렸다”고 말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각료인선 과정에 대해 김중권(金重權)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경제는 DJ가 잘 알기 때문에 자민련에 맡겨도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했었다. 반면 국방부 등 국정 안정과 관련된 분야는 직할할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자민련의 생각은 달랐다. DJ 정권의 이념적 편향에 대한 일반의 우려를 중화시키기 위해서도 안보 관련 부서 일부에 자민련 출신이 들어가야 한다는 게 자민련측의 주장이었다.
JP의 비서실장을 지낸 이동복(李東馥) 전 의원은 “당초 97년 7, 8월 DJP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도 국가 이념을 확실히 하는 의미에서 안보관련 부처를 자민련이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JP가 중도에 이 같은 요구를 거둬들임으로써 안보정책과 관련한 정권 내부의 이념적 견제 장치를 제도화하지 못해 결국 DJ 정권의 대북 통일 정책이 국민적 합의를 무시한 채 ‘한쪽’으로 치닫게 됐다”고 지적했다.
각료 배분 방식을 둘러싼 갈등은 DJP 단일화 합의 당시 ‘각료추천은 양당 동수로 한다’는 원칙 외에 아무런 구체적 조항을 두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실제 정부 구성을 위한 양당 협상에서는 적재적소의 인선보다는 ‘나눠먹기’식 주장이 더 잘 통했다. 다음은 김중권의 증언.
“초기 자민련은 대통령비서실에도 동수로 참여하겠다고 주장해 이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모든 자리를 똑같이 나눠야 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통령비서실은 말 그대로 비서직이므로 대통령과 호흡을 같이 하는 사람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논리로 겨우 설득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각료의 동수배분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자민련이 조각 과정에서 천거한 각료 수는 전체 17명 중 5명에 불과했다. 형식상으로는 국민회의 7, 자민련 5, 외부인사 5의 비율로 배분됐지만 외부인사는 모두 김 대통령이 천거한 인물이었다. 자민련측은 인재풀의 한계를 감안해 각료 동수 관철에는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신 JP는 반드시 챙겨야 할 인사에 대해서는 양보를 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주양자(朱良子) 보건복지부 장관의 케이스. 당내에서는 YS시절 재산공개 과정에서 물의를 빚은 주양자의 입각을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JP는 여성부총재로서 ‘당 기여도’가 큰 그를 유일한 여성장관 후보로 추천했다. 당내에서는 주양자가 JP에게 ‘각별한 공’을 들였다는 수군거림도 있었으나 각료 추천은 철저히 JP의 몫이라는 것이 불문율처럼 돼 있었기 때문에 공개적인 이의제기는 없었다.
취임 56일 만에 주 장관의 부동산 투기의혹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청와대가 그의 경질을 조심스레 타진하자 JP는 “투기의혹을 받는 사람이 여럿인데 왜 다른 사람은 문제가 안 되고 주양자만 문제가 되느냐”며 강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당시 여권 고위관계자는 “JP가 ‘주양자는 여성이고 나름대로 의미도 있는 데 일을 좀 시켜보고 공헌토록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뜻을 청와대에도 전해왔다. 그러나 본인의 소명이 미흡하고 국민여론도 가라앉지 않았다”며 주양자에 대한 JP의 집착을 설명했다.
반면 DJP연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박태준(朴泰俊)이 적극 천거했던 최재욱(崔在旭) 전 의원은 사정이 달랐다. 언론계와 청와대 대변인 경력 등에 비추어 당초 문화관광부장관에 거명됐던 그는 “방송업무를 관장하는 ‘통치권’에 직결되는 부처를 내주기는 어렵다”는 DJ측의 반대에 부닥쳐 ‘전공’과 무관한 환경부장관을 맡았다.
이처럼 JP의 신임이 공동정부의 각료 추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을 지켜본 자민련 의원들은 이후 JP의 눈에 들기 위한 ‘눈도장 찍기’에 더욱 공을 들였다.
2001년 1월 DJP 공조가 복원된 뒤 그해 봄 이뤄진 3·26 개각의 뚜껑이 열리자 일부 의원들이 ‘예약’해둔 장관직 자리가 보다 강력하게 로비를 한 다른 인사로 바뀌었다는 뒷 얘기가 무성했다.
자민련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긴 이양희(李良熙) 이완구(李完九) 의원의 경우 입각을 약속받았으나 막상 예상 밖으로 ‘물 먹은’ 데 대한 배신감도 일부 작용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처럼 공동정권의 ‘나눠먹기’식 각료추천 과정에서 최소한의 ‘검증’의 원칙은 여지없이 무너졌고, 결국 DJ의 국정운영에 부담으로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실종된 합당설▼
99년 3월. 진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국방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한 자민련 한영수(韓英洙) 부총재는 귀빈대기실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안정 과반수 의석을 갖고 국정을 운영하려면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합당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DJ는 “자민련에 그런 생각을 가진 의원들이 많으냐”며 즉각 반응을 보였다.
정권 초부터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던 합당설은 이 해 7월17일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DJ와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총재간의 부부동반 만찬회동에서 결말이 지어졌다. DJ의 한 핵심 참모는 “DJ가 JP를 따로 옆으로 불러 조심스럽게 합당 의사를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실제 이 뒤 민주당 한화갑(韓和甲) 사무총장과 자민련 김현욱(金顯煜) 사무총장, 한 총장과 JP의 측근인 한병기(韓丙起) 전 유엔대사간에는 총재직과 공천권을 JP에게 넘겨주는 것을 전제로 한 합당 논의가 물밑에서 진행됐다.
그러나 자민련 내에서는 충청 영남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합당 밀약설’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결국 김 사무총장과 이양희(李良熙) 대변인은 이런 당내 기류를 전달하기 위해 이 해 12월 남미 순방을 마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잠시 머물고 있던 JP를 찾아갔다.
김현욱은 다짜고짜 “합당은 절대 안 된다. 모두 죽는 길이다”고 JP를 압박했다. 이에 JP가 “모두의 뜻이냐”고 묻자 김현욱은 “모두의 뜻이다”고 강조했다. 돌아온 JP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럼 관두지 뭐.”
상황을 주도하기보다는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JP 특유의 스타일이 단적으로 드러난 대목이다.
JP는 이 직후 즉각 기자간담회를 갖고 “합당은 없다”고 선언했다.
귀국 직후 JP는 DJ와의 조찬회동에서 합당 불가 입장을 재확인했다.
▽DJ〓남미 순방길에 ‘합당은 안 된다’고 하셨던데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까.
▽JP〓예.
▽DJ〓그럼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도록 하죠.
10여분의 짤막한 대화로 합당설은 이후 두 사람의 대화에서 사라졌다. JP는 곧 자민련에 복귀해 16대 총선을 독자적으로 치르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특별취재팀 명단▼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김동원 김두영 신석호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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