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33>3부 ⑦경제팀 인사의 난맥상

  • 입력 2003년 8월 20일 17시 20분


김대중 대통령은 5년 임기 동안 재정경제부장관을 5번,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을 6번 바꿀 정도로 개각을 자주한데다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소신파보다는 ‘현실순응형’ 인사를 중용함으로써 경제정책이 혼선을 빚게 됐다는 지적이다. 2000년 8월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진념 재경부장관(왼쪽)이 이기호 경제수석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김대중 대통령은 5년 임기 동안 재정경제부장관을 5번,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을 6번 바꿀 정도로 개각을 자주한데다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소신파보다는 ‘현실순응형’ 인사를 중용함으로써 경제정책이 혼선을 빚게 됐다는 지적이다. 2000년 8월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진념 재경부장관(왼쪽)이 이기호 경제수석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대통령께서 재정경제부 장관을 맡아 국민의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개혁을 마무리해 달라고 하십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쯤 지난 2000년 7월 중순. 한광옥(韓光玉) 대통령비서실장은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김종인(金鍾仁)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을 만나 DJ의 뜻을 전하며 입각을 제의했다.

그러나 김종인의 반응은 입각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는 게 상례인 여느 인사들과는 달랐다. 그는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면 맡겠다”며 조건을 걸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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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이 무엇인지 의아해 하는 한광옥에게 김종인은 “이기호(李起浩)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을 청와대 밖으로 내보내라”고 말했다.

그 후 보름쯤 지난 8월 7일, 개각 명단이 발표됐지만 김종인의 이름은 없었다. 대신 진념(陳稔) 기획예산처 장관이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영전했다. 이기호는 경제수석비서관직에 유임됐다.

김종인의 후일담. “이기호는 내가 경제수석을 할 때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이었다. 당시 기획원에는 진념 차관, 강봉균(康奉均) 차관보, 전윤철(田允喆) 물가국장 등이 포진해 있었다. 그때는 기획국에 이렇다할 현안이 없어 이기호 국장을 만나본 일이 없다. 하지만 그때 받은 인상은 정책에 대한 입장이나 결이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하지만 그때 받은 인상은 소신과 능력이나 세상을 보는 눈 등에서 최고위직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이기호에 대해서는 2001년에도 경제계 일각과 민주당 등에서 퇴진론이 제기된 일이 있다. 당시 여권 실세 K씨가 청와대로 찾아가 DJ에게 이기호의 경질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K씨는 지인들에게 “대통령이 이기호에게 뭔가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며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이기호에 대한 DJ의 신임은 그만큼 강했다. 이기호는 2002년 2월까지 경제수석을 하다가 ‘이용호 게이트’가 터진 와중에 잠깐 청와대를 떠났으나 그해 4월 15일 경제복지노동특보(장관급)로 임명돼 청와대로 복귀한 뒤 DJ와 임기를 같이했다. 경제복지노동특보는 그를 위해 새로 만들어진 자리로 위인설관(爲人設官)이란 비판이 거셌지만 DJ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이기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게 사실이다. 호남 출신으로, 김영삼(金泳三) 정부에서도 노동부 장관에 기용됐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아무튼 이기호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DJ가 임기 후반으로 가면서 경제팀 구성에 있어서도 소신파보다는 ‘현실 중시 또는 현실 순응형’ 위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경제계의 일반적 평가다.

DJ와 오랫동안 개인적 친분이 있는 오호근(吳浩根) 라자드 아시아 회장은 “야당 시절 김 대통령은 합리적 얘기를 귀 기울여 들었지만 권력을 잡은 뒤부터는 그러지 못했다”며 “자기 목소리가 분명한 사람들보다는 지시한 일을 이행하는 데 충실한 사람들을 중용하다 보니 모든 것이 헝클어졌다”고 지적했다.

2000년 ‘8·7개각’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8·7개각을 통해 DJ 집권 초기부터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총지휘했던 이헌재(李憲宰) 재경부 장관이 물러났다. 개혁 성향인 김종인의 기용도 막판에 무산됐다. 대신 현실경제를 중시하는 진념이 경제 총수가 되고, 이근영(李瑾榮) 산업은행 총재가 금융감독위원장에 발탁됐다.

이와 관련해 DJ정부 핵심 관계자는 “당시 DJ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조기에 극복하고 경제를 회복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점에서 경제가 여전히 위기상황이라는 전제하에 구조조정을 계속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던 이헌재가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고 말했다.

어쨌든 8·7개각으로 경제팀의 ‘색깔’이 바뀌면서 경제정책의 방향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개각 4개월여 뒤인 2000년 12월 초, 청와대에서 진념 재경부 장관 주재로 열린 긴급회의는 이런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날 회의는 회사채 신속인수제 도입을 비롯해 현대그룹에 대한 자금지원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것이었고, 진념, 이기호, 이근영, 전철환(全哲煥) 한국은행 총재, 엄낙용(嚴洛鎔) 산은 총재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 대부분은 현대 지원에 대해 별다른 이의가 없었으나 유독 엄낙용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진념은 버럭 고성을 지르며 “(현대 지원이) 우리 먹고 살기 위한 것이냐. 시장 안정을 위한 것이지”라고 엄낙용을 대놓고 질책했다는 것이 한 참석자의 전언이다.

이 참석자는 “장관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봤다”며 “현대 지원 방침은 당시 고위층 차원에서 이미 결정됐던 것 같다. 진 장관 주재 회의는 말하자만 그 실행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던 셈인데, 엄 총재가 이의를 제기하니 화가 났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2개월여 뒤 엄낙용은 돌연 경질됐다. 취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를 두고 금융계에서는 엄낙용이 진념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엄낙용은 당시 또 다른 ‘미운 짓’을 하고 있었다. 그가 취임하기 2개월 전인 2000년 6월 초 당시 산은 총재이던 이근영이 규정을 어겨가며 현대상선에 4000억원을 당좌대출해 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청와대와 국가정보원 및 금감위 등을 찾아다녔던 것. 이 대출금 가운데 상당액이 북한으로 넘어갔으니 엄낙용은 시한폭탄을 들고 다닌 셈이었다.

이를 두고 전직 재경부 고위관료 K씨는 “DJ 정부 때 정치지향이 강한 일부 경제 관료들 때문에 경제정책이 중심을 잡지 못했다. 경제가 정치논리에 밀리는 일이 되풀이되다 보니 집권 말기로 갈수록 경제가 어려워졌다”고 꼬집었다. DJ 정부 후반기에 경제정책을 담당한 경제장관들이 정치 입김에 휘둘려 경제 합리성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경제팀간의 불협화음, 경제 사령탑의 잦은 교체 등도 DJ 정부의 경제가 ‘외화내빈’으로 치닫게 한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집권 초기 DJ의 경제팀은 첨예한 내부 갈등을 빚었다. DJ가 정부 출범 석달 만에 청와대 경제비서진이 자리 바꾸기를 했던 것도 그 갈등과 무관치 않다.

98년 5월 18일, 김중권(金重權) 대통령비서실장은 김태동(金泰東) 경제수석비서관과 강봉균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맞바꾼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다. 당시 이규성(李揆成) 재경부 장관과 이헌재 금감위원장 등 경제장관들이 김태동을 교체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그만두겠다는 말을 요로에 하고 다녔던 것이다.

재경부 출신 K씨는 “이규성 장관은 재임 동안 3번 사의를 표명했는데, 그중 하나는 김태동을 물러나게 하라는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이규성은 “내가 사의를 표명한 것은 건강이 안 좋았기 때문이었다”면서도 “김태동 수석과는 의견이 맞지 않아 업무 추진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 당시 경제장관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던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강봉균도 “김태동 수석은 DJ가 직접 발탁했다고 들었다. 그런 사람을 석 달도 안돼 바꾼 것은 경제장관들의 뜻을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재경부 장관을 5번, 경제수석을 6번이나 바꿀 정도로 개각을 자주했다. 2000년부터 친인척 비리가 잇따라 터지자 국면전환을 위해 개각을 활용했다는 지적도 있고, 인재난으로 인해 검증이 안 된 인사를 기용하다 보니 겪게 된 시행착오였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잦은 개각으로 인해 경제정책 추진의 일관성이 결여됨으로써 정책 혼선이 되풀이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게 재계와 경제부처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좌초된 '분배개선'▼

김대중(金大中) 정부 초기 ‘DJ노믹스’라는 조어가 인구에 회자됐던 적이 있다. DJ노믹스는 97년 대선 때부터 DJ에게 조언해 온 경제학자들의 모임인 ‘중경회’ 사람들이 만든 개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DJ의 경제철학을 담은 용어라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중경회는 재정경제부와 함께 98년 9월 1일 DJ노믹스를 집대성한 ‘국민과 함께 내일을 연다’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DJ노믹스의 주요 내용으로 △시장경제질서 유지를 위한 정부 역할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질서자유주의’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재해석 등을 제시했다. DJ노믹스의 지향점은 대체로 ‘분배 개선’ 쪽이라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었다.

DJ 집권과 함께 중경회 멤버들은 좌장격인 김태동씨가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에 기용된 것을 비롯해 정부 핵심 요소요소에 포진해 DJ노믹스가 현실경제에 스며들 수 있도록 여러 정책을 입안했다. 윤원배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이진순 KDI원장, 이선 KIET원장, 신봉호 대통령경제비서관, 장현준 에너지경제연구원장과 민주당 이강래 김효석 의원 등이 그들이다.

그들이 입안하고 실행하려 한 정책은 기업규제완화 국민기초생활보장제 의약분업 국민연금확대 주5일 근무제 등이다.

하지만 중경회는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 후 1년도 안돼 사실상 해체됐다. 김태동은 경제수석에 임명된 지 석달 만에 정책기획수석으로 좌천됐으며 99년 2월에는 그 직에서도 물러났다. 윤원배는 98년 5월 금감위 부위원장에서 중도하차했다. 선장만 남고 기관사와 항해사를 잃은 ‘DJ노믹스호(號)’의 항해는 사실상 이로써 끝났다.

‘레이거노믹스’로 불리는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 즉 감세를 통해 설비투자를 유도함으로써 국부를 늘린다는 공급중시 경제정책은 일관성을 유지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배 개선을 지향한다는 DJ노믹스는 그 입안자들의 퇴장과 함께 표류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DJ 정부 기간 분배가 개선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의 집중이 가속화됐다는 비판까지 듣게 됐다.

▼특별취재팀▼

▽팀 장=이동관 정치부장

▽정치부=반병희 차장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명건 이승헌 기자

▽경제부=홍찬선 박중현 김두영 기자

▽기획특집부=윤승모 차장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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