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43>5부①언론사 전격 세무조사

  • 입력 2003년 11월 5일 17시 13분


김대중 정부는 99년 옷 로비 사건을 계기로 대언론 공격을 본격화하기 시작해 결국은 세무조사까지 갔다. 이에 비춰보면 집권 초기인 98년 4월 신문의 날 리셉션에 참석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언론의 공이 컸다”고 덕담을 하던 DJ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동아일보자료사진
김대중 정부는 99년 옷 로비 사건을 계기로 대언론 공격을 본격화하기 시작해 결국은 세무조사까지 갔다. 이에 비춰보면 집권 초기인 98년 4월 신문의 날 리셉션에 참석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언론의 공이 컸다”고 덕담을 하던 DJ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동아일보자료사진
“언론 개혁을 해야 한다는 시민단체들의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몇몇 언론단체는 언론사 세무조사를 촉구하는 시위를 한다고 난리다.”

언론사 세무조사 전격발표가 있기 두 달여 전인 2000년 12월 초. 당시 신광옥(辛光玉)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은 일부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2000년 말 당시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호남 편중인사에 대해 집중적인 비판이 쏟아지고 있었다. 대형 벤처비리 사건도 속속 터져 나왔다. 진승현 게이트와 정현준 게이트 등 각종 ‘게이트’가 연일 신문 1면을 장식했다.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언론환경은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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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DJ측은 그해 10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한껏 분위기가 고양돼 있던 터라 더욱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청와대에서는 “DJ의 치적이 언론의 무차별 비판으로 멍들고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왔다.

당시 공보수석실 비서관을 지낸 C씨의 설명. “그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대두된 것이 바로 언론사 세무조사였다. 언론에 더 당할 것이 없을 만큼 당했다는 주장과 함께, 정권 입장에서도 언론에 대해 조치를 취할 것은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는 마침 김영삼(金泳三) 정부 때 했던 언론사 세무조사가 끝난 지 5년이 돼 가는 상황이었다. 어느 업종도 5년마다 한 번씩은 세무조사를 하는 만큼, 언론사 세무조사의 명분은 충분했다.”

C씨는 “그 시점까지만 해도 세무조사를 진짜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일부 이론이 없지 않았으나 최고위층의 의지가 워낙 강해 금방 묻혀 버렸다. 그러나 당시 권력 내부에는 언론사 세무조사를 안한다면 모르되, 한다면 YS 때처럼 사후에 적당히 무마해 줘선 안 되며 끝까지 원칙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확실하게 있었다”고 덧붙였다.

DJ 정권에서 언론사 세무조사를 누가 기획하고 실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당시 국세청(청장 안정남·安正男)이 자체적으로 세무조사 원칙을 세워 실행한 것일 뿐 정권의 의도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DJ 정부의 공식 설명이나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DJ 정권 내내 최고 실세였고, 언론관계를 담당하기도 했던 박지원(朴智元)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언론사 세무조사를 기획한 배후 당사자였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박지원 본인은 이에 대해 “나는 오히려 세무조사를 반대한 사람이다. 2001년 초 세무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를 듣고 DJ를 찾아가 ‘이건 안 된다’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DJ가 ‘자네는 이 일에 관여하지 말게’라고 잘라 말해 더 이상 얘기를 못했다”고 설명하곤 했다. 전후 사정으로 볼 때 언론사 세무조사는 결국은 DJ의 최종 결심에 따라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게 DJ 정부 관계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그렇긴 하지만, 언론사 세무조사의 필요성을 DJ에게 건의하거나, 실행 계획을 입안한 인사들은 적지 않았다. 실제로 정권 주변 인사들이 작성한 언론사 세무조사 관련 문건들이 사후에 폭로되기도 했다.

2000년 11월 30일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문건도 그런 정황을 보여주는 한 증거다. 올 3월 초 한 주간지가 폭로한 이 문건은 ‘언론환경 정비를 통한 정국돌파 방안’이란 제목에 ‘민정(00.11.30)’이라는 표시가 돼 있다. 문건은 “최근 일련의 사건들(각종 게이트 등)로 인해 그동안의 많은 성과와 정부의 개혁의지가 퇴색하고 있는 것은 기득권 세력과 정권탈취에 혈안이 된 야당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극우반공 수구언론의 비협조 탓”이라고 메이저 신문(동아 조선 중앙)을 공격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이 문건은 △탈세와 탈루 수입 적발 △금융특혜 중단과 기존 여신 회수 △내부자거래 등 불공정행위 단속 △사주들의 각종 비리 내사 △언론사 내부의 인사권에 대한 영향력 제고 등 8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국세청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원회 등이 긴밀히 협조해 “철저한 보안유지 속에 주도면밀한 계획을 수립, 전방위적이며 동시다발적으로 신속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문건은 제시했다.

이른바 ‘언론개혁’에 대한 요구는 이 문건이 처음은 아니었다. 98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이른바 언론개혁에 관한 건의가 DJ에게 적잖게 보고됐다. 이와 관련해 D씨는 “집권 초기만 해도 DJ는 언론개혁 관련 문건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부가 주도하는 언론개혁은 자신의 정치철학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국회와 시민단체, 언론인과 언론단체가 토론을 통해 자율적으로 개혁하라는 것이 DJ의 방침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론도 있다. DJ는 실제로는 초기부터 ‘타율’을 통한 언론개혁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DJ 정부에서 일했던 E씨의 증언. “언론사 세무조사 등 ‘개혁 프로그램’에 대한 기본 준비는 DJ 정권 출범과 함께 기획됐다. 일부 참모들은 ‘메이저 신문사들은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는 경고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초기만 해도 지지기반이 워낙 취약해 언론과 일전을 벌이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극복하는 것도 버거운 상황에서 언론까지 건드리기에는 솔직히 힘에 부쳤던 것이다.”

DJ 정부 인사들과 자주 어울렸던 F씨는 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DJ는 99년 6월 ‘옷로비’ 사건 때 언론을 손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본다. 당시 DJ는 ‘마녀사냥’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언론보도를 비난했는데 이는 뭔가 결심을 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다만, 언론사 세무조사가 2001년 이후로 넘어간 것은 노벨평화상과 관계있다고 본다. DJ는 세무조사가 언론탄압 논란으로 이어지면 노벨평화상 수상에 악재가 될 것을 염려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금은 열린우리당으로 간 민주당 출신 한 의원은 “2000년 초 DJ를 만난 자리에서 언론사의 소유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건의했더니 DJ는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라. 소유구조를 건드리면 뉴욕 타임스부터 언론 탄압이라고 비판하고 나설 것이다’ 라고 제지 하더라. DJ는 정부의 대언론 조치가 세계 여론에 어떻게 비칠지 그만큼 의식을 많이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2001년 1월 11일 DJ는 연두기자회견에서 “언론계 학계 시민단체 국회가 합심해서 공정한 언론개혁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마침내 ‘언론개혁’을 선언했다. 곧바로 국세청은 2월 8일 중앙일간지와 방송 통신사 등 23개사에 대해 세무조사에 돌입했다. 6월 20일 세무조사 결과 발표와 함께 국세청은 동아 조선 등 6개 언론사 법인과 사주를 검찰에 고발했다.

세무조사와 이후 사법처리 과정이 진행되면서 정권의 언론에 대한 압력은 가중됐다. 2001년 9월 한나라당 박종웅(朴鍾雄) 의원은 국회 문화관광위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편집간부 6명을 실명으로 거론하며 “현 정부가 해당사에 이들을 인사조치하라고 요구하면서 협박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실제 일부 언론사 경영진에는 정권 핵심부로부터 자신들과 ‘코드’가 맞지 않는 언론사 간부를 교체해 달라는 직간접적인 요구가 전달되기도 했다.

언론개혁에 대한 DJ의 의지는 세무조사 이후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DJ 정부 후반기 청와대 고위직을 지낸 G씨는 “2001년 말, DJ에게 언론과의 화해 필요성을 건의했더니 DJ는 정색을 하며 ‘예수님께서는 로마로 가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로마로 갔다. 내가 언론개혁을 말할 때도 그런 심정이었다’고 잘라 말하더라. 대통령이 하도 엄숙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봇물처럼 터져나온 언론장악 프로젝트▼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언론개혁’에 관한 문건이 유달리 많았다. 물론 이런 문건이 폭로될 때마다 정부측은 ‘정체 불명’이라거나 ‘습작 차원’이었다는 해명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언론 관련 문건이 많았다는 사실 자체가 어떻게든 언론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DJ 정부의 의지가 그만큼 강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게 일반론이다. 문건들이 한결같이 ‘비판언론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언론 장악’의 필요성을 명시한 최초의 문건은 1999년 10월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 의원이 폭로한 ‘성공적 개혁추진을 위한 외부 환경 정비 방안’(99년 6월 작성)이다. 이 문건은 중국 베이징에서 연수 중이던 문일현(文日鉉) 전 중앙일보 기자가 작성해 이종찬(李鍾贊) 전 국가정보원장에게 전달한 것. 동아 조선 중앙 등 ‘빅3’ 신문의 공격으로 인해 정부의 개혁추진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조치’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이 문건은 언론개혁의 구체적 방안으로 정부 사정기관을 총동원할 것을 제안해 파문을 일으켰다.

DJ 정부는 대통령직인수위 시절인 98년 2월 향후 강력한 야당지 출현 가능성을 경고하는 내용의 ‘새 정부의 언론정책 추진계획’ 문건을 작성하는 등 정권 초기부터 언론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2000년 작성된 ‘최근 언론논조 분석’ 문건은 “동아 조선 중앙 문화 등 4개 신문의 비판이 위험 수위에 도달했으며 효율적 국정운영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이들 신문을 ‘비판 카르텔’로 표현하는 등 적대감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 11월 30일 민정수석실에서 작성한 것으로 돼 있는 ‘언론환경 정비를 통한 향후 정국 돌파방안’은 ‘언론 개혁’의 구체적 방안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이후 실제 상황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가장 눈에 띈다. 이 문건은 특히 국세청 금융감독위 공정거래위 검찰 경찰 국정원 등 사정기관을 동원해 세무조사는 물론 사주 비리내사 등 가능한 모든 방식을 동원할 것을 제안하는 등 언론통제에 대한 방법론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특별취재팀▼

▽팀 장=이동관 정치부장

▽정치부=반병희 차장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윤상호 이명건 이승헌 기자

▽경제부=홍찬선 박중현 김두영 기자

▽기획특집부=윤승모 차장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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