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참회록]⑥상임위장의 고뇌/신영국 의원

  • 입력 2003년 8월 25일 18시 35분


서영수기자
서영수기자
98년 11월 중순 어느 날 새벽. 전날 마신 술 때문에 목이 타 평소보다 일찍 잠이 깬 한나라당 신영국(申榮國) 의원은 막 배달된 조간신문을 집어 들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중진 K의원, 공천헌금 수십억원 수수 의혹 검찰 수사 중’이라는 시커먼 제목의 기사를 보는 순간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명절 때 K의원에게서 300만∼500만원 정도가 든 ‘떡값’ 봉투를 받아왔던 신 의원의 머릿속에는 ‘아하, 그게 그 돈 이었나’하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는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룬 것은 물론 한동안 ‘검찰’이라는 두 글자만 봐도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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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행히 검찰에 불려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나도 공범이나 마찬가지’라는 가책과 K의원에 대한 미안함이 뒤엉켜 착잡함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의원들이 말합디다. 선거 치르고 지역구 관리하는 데 감당할 수 없는 돈이 들다 보니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누구도 돈을 줄 때 미리 조건을 걸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엔 공짜가 없더군요. 얼마 지나면 ‘도와 달라’는 부탁이 오게 마련이죠. 그래도 준다는데야 우선 받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15일부터 24일까지 본보 기자와 수차례 접촉한 끝에 어렵게 말문을 연 그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아 본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런 일 없다”면서도 “정치인 중 누가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다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그는 “의원들에게만 돌을 던질 수는 없다”며 ‘돈 바라는 사회’의 문제점도 조목조목 꼬집었다.

“13대 경험입니다만 돈 없이 지역구를 돌아다니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어디 한번 가려면 빈손으로 갈 수 있나요. 돈 봉투를 가져가지 않으면 ‘뭐 하러 왔느냐’는 식이죠.”

그는 ‘물먹는 하마’처럼 여기저기 국회의원들에게 손 벌리는 곳이 많다보니 이런 돈 저런 돈 가리지 않고 받다가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밥 얻어먹고 봉투 몇 번 받으면 코가 꿰입니다. 무엇보다 (밥 사거나 돈 준 사람이) ‘나하고 밥 같이 먹는 사이다’ ‘나한테 꼼짝 못하는 사람이다’고 헛소리를 하고 다닙니다. 전화를 걸 때 말투부터 반말 비슷하게 달라져요.”

그는 이 때문에 최근 들어서는 아예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저녁식사 약속마저 일절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물 좋다는 건교위원장을 맡고 있어 자금 사정이 좀 낫지 않으냐’는 질문에 “야당 소속이어서 갖다 주는 데가 별로 없다”고 발을 빼면서도 ‘선물’은 적지 않게 들어온다고 시인했다.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어서 그런지 고급과일 양주 갈비짝 등 별것이 다 들어옵니다. 요즘은 직접 오는 것도 아니고 택배로 보내 버리니까 받지 않을 방법이 없어요. 명절 때면 동네 창피해 못살겠어요. 수취를 거부해도 어떤 경우는 대문 앞에 갖다 놓고 가 버립니다.”

그는 3선까지 이르면서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바를 토대로 “의원들에게 접근하는 업계의 로비 자금도 ‘안전도’가 다르다”고 귀띔했다.

“협회나 단체 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아 위험하다는 게 정설이죠. 대기업이 특정 의원과 1 대 1로 접촉하는 ‘비밀로비’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돈일 겁니다.”

개별기업의 로비 규모에 대해서는 “몇백억원이 오갔다는 소문이 도는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의 현대비자금 사건이나 97년 한보사건 같은 것은 대기업과 권력측간에 이뤄지는 특수한 사례일 뿐”이라며 “일반 의원이 접하는 액수는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은 규모”라고만 답했다.

신 의원은 또 “후원회나 관혼상제라는 명분을 내세워 합법적으로 로비를 하는 경우도 있다”며 “선관위에 신고를 하는 합법적 후원금이라 해도 몇백만원이 넘으면 ‘보험성’이든 ‘대가성’이든 뭔가 찜찜함이 남는 게 사실이다”고 말했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묘책은 없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정치자금의 완전 공영제’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그는 “이런 정치구조에서 누군들 돈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며 “돈 때문에 국정이 왜곡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신영국 의원은…▼

기업인 출신 3선 의원(60세). 경북 문경에서 중학교까지 마친 뒤 홀로 상경, 자장면 배달과 구두닦이, 무역회사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고교(동양공고)와 대학(명지대 경영학과)을 마쳤다.

78년 선반 밀링 등 금속공작기계를 만드는 주식회사 ‘남북’을 설립, 기업인으로서 본격 활동을 시작했고 96년에는 문경대학을 설립했다.

13대 총선에서 금배지의 꿈을 이룬 뒤 14대에는 낙선했으나 15, 16대에 내리 당선됐다.

서울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지역구(경북 문경-예천)에서만 활동용으로 마티즈를 손수 운전해 ‘짠돌이’로 소문나 있다. 후원회조차 구성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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