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은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국가질서를 유지하고 간첩과 좌익세력의 활동을 억제하는 나름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모호한 법조문과 지나친 법집행으로 사상범을 양산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때문에 그 존폐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국보법의 뿌리와 실태=국보법은 1948년 12월 여순사건의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제정된 뒤 11차례 개정됐다. 자유당 정권 하에선 국가기밀을 군사정보뿐 아니라 사회·문화정보까지 확대해석해 ‘막걸리 국보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4·19 직후 민주당은 인심혹란죄를 없애는 등 법을 대폭 완화했으나, 5·16으로 집권한 군부는 반국가단체 찬양고무죄 등을 신설하는 등 국보법 보다 강화된 반공법을 제정했다.
이어 1980년 신군부는 반공법을 폐지하고 통합 국보법을 마련했으나 찬양고무죄 등은 존속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국보법 개폐 논의가 무성했지만 1991년 일부 조항을 개정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본골격이 유지됐다.
▽폐지운동 및 근거=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최근 국보법 폐지를 위한 일종의 ‘태스크포스팀’을 가동키로 결의했다. 민변은 참여연대와 인권운동사랑방 등 시민·사회단체와 연계해 17대 국회와 정부가 국보법 폐지에 적극 나서도록 촉구할 계획이다.
민변의 백승헌(白承憲) 변호사는 “국가의 안전을 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기존의 형법으로도 충분히 처벌할 수 있기 때문에 국보법이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며 “국보법의 폐지는 정상적인 상황으로의 복귀”라고 말했다.
▽일부조항 개정론=대한변호사협회 등은 전면 폐지는 아직 이르다는 입장. 반국가단체 규정과 찬양고무죄 불고지죄 등 문제조항은 개정하되 나머지 부분은 일단 존치시키면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한변협 김갑배(金甲培) 법제이사는 “불고지죄는 너무 비인도적이고 찬양고무죄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며 “이들 조항은 손질해야 하지만 국민정서상 완전폐지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체입법론=강금실(康錦實) 법무부장관은 지난해 4월 “시대가 변한 만큼 인식의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며 국보법의 대체법안 검토의견을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이는 강 장관의 사견으로, 법무부의 공식입장은 아니었다.
대체입법론의 근거는 시대와 상황의 변화. 특히 국보법은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반면 남북교류협력법은 북한을 교류협력 대상에 포함하고 있는 법체계의 혼선을 정리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 역시 일부 문제조항을 폐지하고 나머지 부분을 새 법으로 대체하자는 것이어서 개정론과 큰 차이는 없다.
▽존치론=일부 보수적인 법조단체와 재향군인회 등은 현재 만연하고 있는 간첩과 좌익세력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현행 국보법도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 부회장인 임광규 변호사는 “독일도 통일 전에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었던 법을 아직도 고치지 않고 있다”며 “국보법을 개정하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1991년 국보법을 일부 개정한 이후 북한을 교묘하게 찬양하는 것을 처벌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법무부 및 검찰의 입장=법무부 관계자는 “앞으로 이어질 여러 논란에 대비해 법률 및 이론적 검토를 하고는 있지만 국보법 개폐 문제에 대해 우리가 주도적으로 나설 수는 없다”며 “정치권에서의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 또한 “법 집행기관인 검찰로서는 국보법 개폐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신중한 법집행=법원은 개폐론을 고려해 국보법 적용에 신중을 기하는 분위기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10월 초등학생용 통일교재 ‘나는야 통일1세대’를 제작 배포한 혐의로 기소된 이장희(李長熙) 한국외국어대 교수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한 것. 그러나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재독학자 송두율씨에게 반국가단체 규정을 적용하는 등 국보법 적용에 아직 근본적인 변화는 없는 편이다.
검찰과 경찰의 국보법 적용도 갈수록 신중해지고 있다. 지난해 법무부가 발표한 ‘국보법 위반사범 입건 및 처리 현황’에 따르면 1999년 506명에 달했던 위반사범이 지난해 상반기(1∼6월)에는 48명으로 대폭 감소했다. 이수형기자 sooh@donga.com
열린우리 “바꾸거나 없애거나”
한 나 라 “틀 놔두고 일부보완”
각 정당은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에 분명한 입장 차이를 보이면서도 법 개정 쪽으로 방향을 잡아나가는 양상이다.
열린우리당 내에선 법 개정 또는 폐지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한나라당도 적극적으로 개정 검토에 착수할 태세다. 반면 민주노동당은 법 폐지를 이미 당론으로 정했다.
이에 따라 정치권의 보안법 개폐 논의는 17대 국회 개원 직후 민주노동당이 국보법 폐지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각 정당이 민감한 대북관계를 감안해 논의를 당 내로 한정할 경우 이 문제가 정치권의 ‘핵폭풍’으로 떠오를 시기는 상당 기간 미뤄질 수도 있다.
▽열린우리당=지도부는 당분간 법 개폐와 관련한 논의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경제 살리기’에 당력을 집중하겠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26일 밤 17대 국회의원 당선자 워크숍에서 일부 개혁파 의원들은 “악법 폐지가 왜 뒤로 밀려야 하나. 국보법 폐지는 당 정체성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일부 당선자들은 “지금은 민생경제를 살리는 데 힘을 실어야 할 때”라고 반박해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열린우리당은 지난해 9월 창당 이후 ‘뜨거운 감자’를 대하듯 이 문제에 거리를 두고 있다. 4·15총선 공약에도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는 빠져있을 정도다.
하지만 법 개정 내지 폐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108명의 초선 의원들이 언젠가 이 문제에 불씨를 댕길 것이 분명하다. 김근태(金槿泰) 원내대표도 “개인적인 소신은 폐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이해찬(李海瓚) 의원은 “올 미국 대선이 끝나고 개성공단이 완공된 이후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한나라당=남경필(南景弼) 원희룡(元喜龍) 권영세(權寧世) 정병국(鄭柄國) 의원 등 소장파가 법 개정 논의의 중심에 서 있다. 이들은 25일 경북 경주에서 박형준(朴亨埈) 김희정(金姬廷) 이성권(李成權) 당선자 등과 모임을 갖고 법 개정을 적극 검토하기로 뜻을 모았다.
권 의원은 “국보법의 틀은 그대로 두더라도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조항의 개정을 검토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근혜(朴槿惠) 대표도 최근 기자들과 만나 “법 폐지는 불가능하나 일부 조항은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법 개정에 찬성의 뜻을 분명히 했다.
심지어 국가안전기획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낸 정형근(鄭亨根) 의원조차도 26일 MBC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찬양 고무와 불고지죄에 대한 법 개정은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일부 의원은 개정 논의를 찬성하면서도 신중론을 펴고 있다.
김문수(金文洙) 의원은 “당장 어떤 결론을 내리려 하지 말고 외부의 전문가들까지 참여하는 당 내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장기간 심도 깊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노회찬(魯會燦) 사무총장은 “국보법 중 내란죄와 간첩죄는 형법으로도 얼마든지 처벌이 가능하다. 국보법 유지는 국가 이미지에도 안 좋고 실효도 없다”며 법 폐지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민노당이 17대 국회 개원 직후 국보법 폐지 법안을 제출할지는 미지수다.
김정진 당 법률지원단장은 27일 “민노당의 힘만으로는 법 폐지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곧바로 폐지 법안을 제출할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민노당 독자적으로 폐지 법안을 내는 것은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해 열린우리당 과의 제휴도 검토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문제의 법 조항=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에서 개정 내지 폐지 대상으로 거론하는 조항은 ‘반국가단체’의 정의를 내린 2조와 ‘찬양 고무’ 및 ‘불고지죄’를 각각 규정한 7조와 10조다.
한나라당 박 대표 등은 이 중 특히 불고지죄의 경우 범죄 혐의 및 대상에 대한 규정이 너무 모호해 개정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또 국보법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2조 반국가단체 조항은 북한이 혁명노선을 포기하는 등 크게 변하더라도, 정부를 ‘참칭(僭稱·제멋대로 임금을 자처한다는 뜻)’하는 한 반국가단체를 벗어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고영구(高泳耉) 국정원장도 지난해 4월 국회 정보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참칭’ 규정의 삭제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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