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퇴직근로자의 분신자살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정규직 위주의 노동운동을 해 온 노동계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올 임금단체협상의 핵심 요구사항으로 내건 노동계는 목표 관철을 위해 6월을 집중투쟁 기간으로 선언하고 나섰다.
반면 고용시장의 유연화를 중시하는 재계도 물러설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비정규직 관련법안의 연내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도 노사 양측의 틈새에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현주소=비정규직은 1주일∼2년 단위로 재계약하거나 하청업체 신분으로 원청업체에서 일하는 근로자를 뜻한다. 정부는 비정규직 규모를 전체근로자(1430만명)의 32.6%인 460만명으로 집계하는 반면 노동계는 784만명(55.4%)이라고 주장한다.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의 50∼60% 수준. 학자금 수당 휴가 같은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일부 현장에선 식당 샤워장 버스 이용까지 차별을 받고 있다. 공공부문 전체근로자 124만9200명 중 23만4300명(18.8%)이 비정규직이다. 집배원 환경미화원 등이 다수를 차지하며 역시 정규직과의 차별이 심하다.
▽쟁점=올해 임단협에서 10.5∼10.7%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는 한국노총과 민노총은 비정규직의 임금도 정규직의 85% 수준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
그러나 이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기업이 20조6000억(한국경제연구원)∼26조7000억원(한국금융연구원)의 추가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는 논거에서다.
양대 노총은 “재계가 비정규직 문제에 적극 임해준다면 정규직의 양보도 가능하다”는 입장이지만 개별 사업장에서 정규직이 실제로 기득권을 양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노동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상당수를 정규직화하고 하반기에 ‘파견제 근로자보호법’ 개정과 ‘기간제 단시간 근로자보호법’ 제정도 추진할 계획이다. 그러나 노동계는 정부가 파견업종을 늘리는 데 반발하고 있고, 재계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민간 부문에 미칠 파장을 우려한다. 예산 확보와 고용시장의 유연성 악화를 걱정하는 경제부처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
▽해법=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한국에 ‘스페인식 노사모델’을 권고했다. 스페인식 해법은 정규직이 퇴직금 일부를 비정규직에 돌리는 등 정규직의 양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비정규직을 많이 쓰는 기업에는 벌칙을, 정규직 채용을 많이 하는 기업에는 인센티브를 주는 것도 특징.
노사정위원회 이호근 박사는 “대기업노조가 두 자릿수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재계는 정규직이 임금을 양보할 경우 이를 비정규직을 위해 사용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훈기자 taylor55@donga.com
▼재계 "정규직이 양보해야 해결 실마리"▼
재계는 경영 현실에 대한 냉엄한 진단과 함께 정규직에 대한 지나친 고용보호 문제가 풀려야 비정규직 근로자 보호 문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비정규직 고용이 탈(脫)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기업이 경영전략상의 판단에 따라 선택한 것인 만큼 산업사회의 잣대와 접근 방식만으로 해법을 찾아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최재황(崔載滉) 정책본부장은 “글로벌 경쟁 체제에서 비정규직 고용은 기업 생존 전략의 하나”라며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에만 치중할 경우 기업 경쟁력 약화와 부작용이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비정규직 근로자를 과잉보호하는 법이 나오면 오히려 기업의 편법 인력 운용을 조장하거나 신규 채용을 막는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노사정이 합의한 ‘일자리 만들기’도 취지가 크게 퇴색할 우려가 있다는 게 재계의 목소리다.
물론 재계는 정규직 근로자들이 임금 하락과 고용 유연성 등을 양보할 경우 비정규직에 대한 법률적 보호를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사회보험 퇴직금 모성보호 등으로 고용보호가 확대된 정규직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그대로 두고 비정규직 처우를 개선할 여력이 있는 기업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재계는 올해 임단협에 대해서도 확고한 입장을 밝혀놓고 있다. 경총은 3월 단체협약 체결지침을 만들면서 ‘비정규직 고용은 사용자의 고유 권한으로 단체 협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또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동등 대우 등 비정규직의 근로조건 개선도 정규직과 협상할 사안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다만 경영 여건이 뒷받침되는 기업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거나 준사원 제도를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이 경총의 지침이다.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정치권 움직임▼
정치권도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17대 국회 입성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은 비정규직 차별 철폐 법안 제정을 공언하는 등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도 각론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비정규직 차별 해소라는 대원칙에 찬성하며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양당은 노사 모두를 만족시킬 묘안이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열린우리당=최근 당정협의에서 비정규직 근로자 보호 법안을 조속히 처리해야 할 법안 중 하나로 분류하고 법안에 담을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 중이다. 그러나 정세균(丁世均) 정책위의장은 “차별을 해소해야 하지만,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는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라며 고민을 드러냈다.
당 내에선 몇 개의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우선 임금과 근로조건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동부 산하에 차별규제위원회를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비정규직 근로자가 임금 차별을 신고하면 조사를 거쳐 시정을 강력히 권고토록 한다는 것이 골자다.
또 고용불안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수년간 연속적으로 근무하는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방안, 각 업종의 적정 임금을 산정해 사용자측이 임금을 책정할 때 준용토록 하는 방안 등이 검토되고 있다.
유련(兪蓮) 전문위원은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있다. 일정 기간 연속적으로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토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당 내에 기획단을 만들어 노사 양측의 의견을 수렴해 관련 법안을 올 9월 정기국회에 제출할 방침이다.
▽한나라당=비정규직에 대해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데는 찬성하고 있다.
그러나 동일노동임을 증명할 방법이 없고 이를 판단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등 선결과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준과 원칙의 정립 없이 제도만 만들 경우 오히려 사용자측에 의해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당 정책개발특위 이한구(李漢久) 위원장은 “한나라당은 정책개발특위를 발족해 비정규직 관련 법안을 포함한 각종 정책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 위원장은 그러면서도 “막연하게 규정하면 있으나마나한 법률이 되고, 강제 수단을 규정해 놓으면 기업들이 악용할 수도 있어 입법이 간단치 않다”고 토로했다.
특히 민노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비정규직 1년 이상 근무시 정규직으로 자동 전환할 경우 기업들은 오히려 1년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갈아 치워 실업이 가중되거나, 아예 기업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민노당=17대 국회 개원 후 바로 비정규직 차별 철폐법안을 낼 태세다. 단병호(段炳浩) 당선자는 “정부 여당이 준비하고 있는 비정규직 보호 입법은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것으로 동의할 수 없다”며 “정규직과의 차별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법안을 제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노당은 근로기준법에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명문화하고, 최저 임금을 2007년까지 평균임금의 50%로 상향 조정해 기업들이 싼 임금으로 근로자를 고용하려는 유혹을 사전에 차단할 방침이다. 또 비정규직으로 1년 이상 근무한 경우 정규직으로 자동 전환하도록 법에 명시하는 방안도 추진할 계획이다. 민노당은 이와 함께 “파견근로 제도가 비정규직 근로자를 양산하고 있다”며 파견근로자법 폐기를 공언하고 있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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