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盧정권, 두 얼굴의 역사 다루기

  • 입력 2004년 8월 3일 18시 51분


노무현 정권의 이중적인 역사다루기 행태가 걱정스럽다.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그제 일본 NHK와의 인터뷰에서 “친일진상규명법은 순수 국내 문제이지 일본과의 선린우호관계를 겨냥해 만든 것은 아니다”고 했다. 지난달 노 대통령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와의 회담에서 “(미래를 위해) 내 임기 중에는 한일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역사란 것이 이렇게 몇몇 위정자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문제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친일(親日)이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행위를 총칭한다. 협력한 사람이 시비의 대상이 된다면 협력하도록 강요한 사람의 잘못부터 따져야 한다. 그런데도 한쪽에 대해서는 규명과 청산을 요구하고 다른 한쪽에 대해선 문제삼지 않겠다고 한다.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서란다. 이해할 수 없는 논리다. 안에선 미래를 위해 과거를 규명, 청산하고 밖에 나가선 미래를 위해 과거를 덮어두겠다고 하니 역사를 이렇게 편의적으로 다뤄도 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현 정권의 논리대로라면 일본의 과거사 반성을 위한 우리의 면면한 노력들은 당장 중지해야 옳다. 군위안부를 포함한 태평양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속죄와 배상 요구도 그만둬야 한다.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 노력도 마찬가지다. 그런 일은 한일관계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친일 인사들을 찾아내 여론의 법정에 세우는 일이다. 그렇게만 하면 역사도 바로잡고 국민통합도 된다.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이러니 “과거는 친일로 잡고, 현재는 반미 자주로 잡아서 미래 주류세력의 교체를 실현하자는 것이 이 정권의 기본 구상”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친일 규명에는 적극적인 정권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서는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사가 삭제되고 대학 교재들조차 고구려를 ‘중원 왕조에 복속된 정권’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뒤늦게 대응을 모색하고 나섰지만 시정 요구에 그치고 있다.

현 정권은 이미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일본과의 미래를 위해 과거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중국이 이를 근거로 ‘한중관계의 미래를 위해서도 과거를 거론하지 말자’고 요구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은 이제 부여사와 발해사까지도 중국 역사로 편입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이러다가는 우리 고대사 전체가 중국사에 복속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 정도다. 그런데도 정권측은 입만 열면 친일이고 유신(維新) 독재니, 그들의 단견(短見)과 역사를 투쟁의 전면에 내세우는 저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란 한 장의 스냅 사진이 아니다. 수많은 사건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과거사 문제만 하더라도 한일 양국관계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동북아 전체 구도 속에서 봐야 된다. 중국은 이미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지지하는 듯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우리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역사의 미아(迷兒)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친일 진상규명이 국내용이라고 했으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정권을 잡았다고 해서 역사 해석의 전권까지도 위임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정권은 유한하고 역사는 무한하다. 5년 단임 정권이 한 세기가 넘는 근현대사를 다시 쓰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역사에 대한 오만(傲慢)과 편견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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