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오후 2시 경기 마석 모란공원내 민주 열사 묘역에서 열린 ‘고 최종길교수 추모제’에서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최근 발족한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에 기대를 걸며 “이제 고인의 명예를 회복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아들 최교수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상실 그 이상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이던 73년 10월16일 언제나처럼 “학교 다녀오겠다”며 출근했던 아버지가 이틀 뒤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온 이후 대문앞엔 늘 ‘낯 모르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아들 최교수의 어머니에게 ‘남편은 간첩이었다. 조사받다가 혐의가 드러나자 투신자살한 거다.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어르고 달랬다.
어머니는 ‘간첩 자식’이란 소문이 날까 두려워 4차례나 자식들 학교를 옮겼다. 이삿짐을 싸고 풀 때마다 손길이 갔던 아버지의 책과 원고들. 늘 자상하고 따뜻했던 아버지가 느껴졌다.
최교수는 고교 졸업 뒤 아버지가 다닌 독일 쾰른대로 유학을 갔고, 아버지의 스승 밑에서 아버지가 공부했던 민법을 공부했다.
세월이 흐르며 ‘아버지 최종길’은 ‘인간’으로 다가왔다. 관료 발탁 제안을 뿌리치고 ‘이 땅에 법치를 세워야 한다’던 대꼬챙이 학자. 유신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서울대법대 학생과장이면서도 시위로 연행되는 제자들 손을 잡고 함께 울던 참스승, ‘신성한 캠퍼스를 경찰이 짓밟는다’며 호통치던 용기있는 교수. 이렇게 학자적 양심을 따르던 아버지는 간첩혐의를 받던 중학 동창생의 참고인으로 중앙정보부에 불려갔다가 50시간만에 ‘7층에서 투신자살’이라는 의문사로 돌아왔던 것이다.
“지금까지 쳇바퀴처럼 맴돌던 ‘진상규명 촉구와 실망’의 악순환을 끝낼 때가 됐다”고 강조하는 최교수는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는 진상 규명이 최우선이다. 수사기관에서 조사받거나 민주화 투쟁을 하다 숨진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파헤치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는 국내외의 각종 증언을 모을 경우 아버지 죽음의 진상에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무엇보다도 ‘당시 중앙정보부 조사관들’의 만각(晩覺)을 촉구했다.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