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 하사관이 사병사살 軍서 18년간 자살로 은폐

  • 입력 2002년 8월 20일 19시 00분


술 취한 하사관이 쏜 총에 맞아 숨진 대학생 출신 사병의 죽음이 군 간부들의 조직적인 은폐로 자살로 처리된 사실이 18년 만에 밝혀졌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韓相範)는 84년 4월2일 육군 제7사단 3연대 3중대에서 발생한 허원근(許元根·당시 21세·사진) 일병의 사망사건과 관련, ‘중대장의 가혹행위 등으로 인한 비관자살’이라는 군 당국의 발표와 달리 “허 일병이 타살됐다”고 20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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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회에 따르면 타살 현장에는 군 간부와 사병 등 10여명이 있었으며, 대대 간부들은 대책회의 끝에 현장을 물청소하고 시신에 총 2발을 더 쏜 뒤 자살로 위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 개요와 은폐〓위원회에 따르면 사건 당일 오전 2∼4시 중대 간부 진급축하 회식 도중 간부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으며 뒷바라지하던 하사관 1명이 술에 취해 M16 소총을 들고 내무반에서 행패를 부리다 우발적으로 허 일병의 오른쪽 가슴에 1발을 쏴 숨지게 했다.

이 사건은 오전 4∼6시경 대대 간부들에게 보고됐고 곧바로 연대에도 보고됐다. 이후 현장에 도착한 대대 간부는 중대장들과 사건을 은폐하기로 하고 내무반을 물로 청소한 뒤 오전 10∼11시경 허 일병의 시신을 부대 인근 폐유류 창고 주변으로 옮겨 머리와 왼쪽 가슴에 1발씩을 더 쏴 자살로 위장했다.

이후 중대 본부 요원들은 “총소리를 듣고 창고 근처로 가 보니 허 일병이 스스로 총을 쏴 숨져 있었다”고 헌병대에 신고했다.

사건 조사에 나선 7사단 헌병대는 허 일병이 소속 중대장의 가혹행위를 비관해 자살한 것으로 결론짓고 4월30일 수사를 종결했다.

소속 중대장은 가혹행위를 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돼 강제 전역했다. 그러나 허 일병을 살해한 하사관은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다.

▽재조사도 자살 결론〓2군단 헌병대와 육군 범죄수사단은 같은 해 사건을 재조사했지만 역시 자살로 결론지었다.

이후 99년 민원 제기에 따라 국방부 사망사고 재조사위원회가 조사하는 도중에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조사가 중단됐으며 대신 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에 나섰다.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장병 10여명은 위원회 조사에서 “허 일병에게 총을 쏘는 것을 봤지만 간부들로부터 사건을 발설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진상규명위는 “사건 조작과 은폐에 대대급 간부들이 개입한 사실이 확인됐다”며 “그러나 연대급 간부 이상의 개입 여부는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허 일병은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3학년 때인 83년 자원 입대했으며 허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許永春·63)씨는 현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의문사지회장을 맡고 있다.

한편 허 일병을 살해한 것으로 밝혀진 당시 하사관은 위원회 조사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적은 있지만 허 일병을 살해한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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