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쟁점은 사건 당일 오전 총기 오발사고가 있었느냐는 점과 군이 사건을 은폐 축소했느냐는 것 두 가지.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느냐에 따라 두 기관 중 한 곳은 공신력에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게 됐다.
▽상충되는 조사결과〓의문사위는 84년 4월 2일 오전 2∼4시에 진급 축하 회식 후 노모 중사가 내무반에서 난동을 부리는 과정에서 총기를 오발해 허 일병이 쓰러졌다고 밝혔다. 이는 당시 중대원이던 전모 상병과 이모 하사의 진술에 근거한 것.
그러나 특조단은 총기 오발 사고가 없었다고 밝혔다. 노 중사를 포함해 당시 중대 내무반에 있던 9명 모두가 ‘총기 오발이 없었다’고 진술했고 노 중사 등 5명에 대한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도 진실 반응이 나왔다는 것.
사고 당일 오전 6∼7시경 대대장의 사고 현장 방문 여부도 엇갈린다. 의문사위는 대대장의 운전병과 당번병의 진술을 토대로 대대장이 현장을 방문했고, 이후 진급을 앞둔 대대장이 사건을 축소해 은폐했다고 발표했다.
특조단은 이 부분도 이견을 냈다. 대대장이 현장에 가지 않았고 사건을 은폐하지도 않았다는 것. 특조단은 운전병과 당번병도 “기억에 없다”거나 “확실하지 않다”고 진술했다고 설명했다.
총기 오발사고 전 노 중사가 내무반에서 난동을 부린 사실과 총기 오발사고 후 내무반 물청소를 한 사실에 대해서도 양측의 발표는 상반된다.
▽여전히 남는 의문〓국방부는 추가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지는 못한 채 중간발표를 했다. 이미 드러난 사실만 놓고 논리싸움을 벌인 셈이 된 것.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도 논란이 예상된다. 18년 전 사건을 거짓말탐지기로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전 상병의 진술을 어떻게 해석할지도 과제다. 국방부는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의문사위는 전 상병이 심경변화 때문에 말을 바꿨다고 반박하고 있다. 특히 국방부는 결정적 진술자인 전 상병을 조사하지도 못했다.
숨진 허 일병의 몸에는 총상 자국이 3군데 있지만 현장에는 탄피가 두 발만 발견된 것도 여전한 의문이다. 내무반 내 중대본부 전원의 야전복 상의에 ‘화약흔’이 있었다는 헌병대 수사기록도 총기 오발사고를 입증할 수 있는 유력한 증거지만 국방부는 이를 조사하지 않았다.
황진영기자 bud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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