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색맹이 있는 사람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자신의 눈에 특정 색이 안 보인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바로 눈의 색맹이 사고(思考)의 색맹으로 이어지는 경우다.
군사정부 시절 정권의 온갖 탄압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대쪽같은 논지의 글로 존경을 받았던 학자 칼럼니스트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데 그 분들 중에는 의외로 유연성이 결여되어 있는 분들도 있었다. 일부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분들은 진보적 지식인의 주장에 불쾌해 했으며 진보적인 분들은 보수주의자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부도덕한 정권과 권력에 대한 비판과 공격은 당연하지만 시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남을 비난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아마도 그러한 경우가 사고의 색맹 상태이지 않을까.
사고의 색맹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집단의 리더가 되면 구성원 모두가 불행해진다. 독선과 아집이 심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독재가 되고 국가기관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자리에 앉으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결정이 나오기가 쉽다. 자신들의 판단만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반 대중의 보편적 정서를 때때로 망각하는 탓이다.
최근 국가인권위는 학교에서의 체벌금지를 법제화하고 학교운영위원회에 학생들을 참여시키라고 교육인적자원부에 권고해 물의를 일으켰다. 교육부는 19일 공식 발표를 통해 거부했지만 이 권고는 교사의 매를 교육적 효과 차원에서가 아니라 인권 침해라는 시각에서 판단하는 것이 합당하냐는 비판을 불렀다. 또 학교와 학부모 지역사회가 학생들에 대한 교육과 지도 방안을 논의하는 기구인 학교운영위원회에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학생들을 참가시키라는 권고 역시 적절치 못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국가인권위뿐만 아니라 부패방지위원회,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이 정권 들어 과거 청산과 인권 옹호 차원에서 생긴 각종 정부기구들이 그동안 업적도 적지 않았으나 모두 유사한 물의를 빚었다. 의문사위는 올해 7월 1997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상태에서 경찰의 검거를 피해 도주하다 아파트에서 추락사 한 한총련 간부의 활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한 데 이어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를 민주화보상위에 요청하기까지 했다. 의문사위의 이 같은 결정은 대법원이 98년 한총련을 이적단체라고 판결한 것과도 정면으로 배치돼 논란을 빚었다.
부패방지위는 올해 4월 전현직 검찰 고위간부 3명을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으나 검찰이 3개월간의 수사 끝에 혐의를 입증할 수 없다며 불기소처분을 내리자 고법에 재정신청까지 했고 이마저도 기각된 일이 있었다. 민주화보상위가 4월 부산 동의대 사건 관련자 46명과 전교조 해직교사 1139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한 일은 물의 수준을 넘어 국민 여론을 분열시키는 지경까지 갔다. 동의대사건은 학생들의 방화로 경찰관 7명이 숨지고 10명이 부상해 관련자들이 방화치사상죄로 대법원에서 확정판결까지 받았던 사건이다.
궁극적으로 국민 화합을 위해 생긴 이들 기구가 내린 몇몇 결정이 오히려 화합을 깨고 사회적 물의를 빚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위원회 멤버 구성부터가 특정 성향의 인사로 편중되어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그 일부가 독선적인 판단을 한 탓일 것이다. 사고의 색맹 상태에서 드러내는 독선과 아집은 청와대를 중심으로 이 정권이 자주 보여왔던 행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색맹 극복법은 먼저 자신이 색맹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다음은 다수의 생각과 시각에 겸허하게 마음의 문을 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정동우 사회1부장 foru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