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김동성/‘자기파괴’는 곤란하다

  • 입력 2004년 8월 22일 19시 12분


외세의 침략과 국권상실, 식민지화와 분단, 전쟁과 궁핍을 겪으면서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하고, 오늘날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가능하게 한 동력은 한국민족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듯 역사발전의 동력이 되어 온 한국민족주의가 최근 들어 오히려 역사 퇴보와 나라 허무는 방향으로 치달으려는 게 아닌가 걱정이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민족주의 운동이건 이를 이끈 주도세력은 분명한 정체와 전략이 있었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민족주의 속내는 정말 알기가 힘들다. 그래서 시인 구상의 ‘우령(偶伶)’이라는 시 구절이 떠오른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이들도 이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중략)이 눈먼 싸움에서 우리를 건져주소서.”

▼官주도 과거청산 역사퇴보 우려▼

21세기 초엽, 위력을 떨치고 있는 한국의 민족주의는 양면의 얼굴을 지녔다. 한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가능케 했고, 우리가 그토록 염원해 온 민주 인권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의 현재적 ‘안티 체제’인 북한정권 지도부를 ‘민족적 동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월드컵 4강 신화를 낳았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대규모 촛불시위를 통해 반미 자주 자존의 열기를 만들어냈으며,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킨 일등공신이 된다.

노 대통령의 올해 광복절 경축사를 신호로 이제 한국민족주의는 ‘과거사 청산’을 내건 ‘관 주도형 민족주의(베네딕트 앤더슨의 개념)’와 ‘대중 민족주의’가 결합된 한국형 운동으로 기승하려 하고 있다.

과거사의 진상을 밝혀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민족정기를 바로잡자는 데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난 200여년간 세계의 민족주의운동 사례를 보면 그 모두가 자기 나름의 시대정신과 미래지향적 목표를 갖고 있었고, 그렇지 못할 경우 재앙을 낳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예가 남미의 많은 나라와 해체 후의 유고연방, 그리고 현재의 중동 국가들이다.

‘관 주도형 민족주의’가 ‘과거사 청산’ 과제를 국정의 제1순위화 시켜놓고 관변 시민단체와 방송이 민족주의 대중화 선전기능을 담당하면서 어두웠던 민족의 과거사를 공략해 얻어낼 것이 과연 ‘민족정기’일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군 창설 멤버와 정부 최고위직을 맡아 온 70대 중반 이후의 원로들 중에, 그리고 대한민국의 나라 됨을 위해 피땀 흘린 나이 많은 보통사람들 중에 ‘천황폐하 만세’의 오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악질적’ 친일파를 추려내겠다고 하겠지만 그 ‘악질’ 정도를 어떻게, 그리고 누가 정당하게 재판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식민지 과거사의 청산은 전적으로 역사학의 소관이요 성숙한 정치문화에 의해서만 완결되는 것이다. 반대로 정파와 특정집단이 나설 경우는 계급 혹은 세속 권력투쟁이나 ‘한풀이’ 정치수단이 될 뿐이다.

민족정기를 세우고 민족자존을 고양시키려는 세계사 속의 민족주의 운동들은 예외 없이 민족사의 긍정적 유산을 발굴 혹은 ‘창조’하거나 미래의 희망을 주조하려는 것들이었다. 최근 중국과 일본의 민족주의 열기가 논란되는데, ‘내재적 접근’을 통해 보면 이들 또한 나름대로 미래지향적인 야망을 숨기고 있는 것이지 과거 회귀적, 감상적 혹은 배타적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우리의 민족주의는 과거에 집착해 급속한 세계의 변혁에 조응해야 할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려 하고 있다. 훗날 역사 퇴보의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특정집단 권력투쟁 도구 아닌가▼

자신의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야당 또한 말려들어가게끔 되어 있는 ‘과거사 청산’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현 상황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국가권력과 정치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파괴적’ 민족주의 운동의 주도세력이 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서 노 대통령 스스로 부르짖어 온 ‘동북아 중심국가’로의 도약을 향한 국력신장이라든가, 협력적 한미동맹과 자주국방의 강화, 그리고 유기적 국민통합이 현 한국민족주의의 지향선이 되도록 자신과 주변을 설득해야 한다.

김동성 중앙대 정경대학장·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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