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북한을 탈출, 중국을 통해 지난 22일 귀순한 김영진씨와 유송일씨 가족 8명은 30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식량난과 김정일 우상화 작업을 비롯한 최근의 북한 실상을 소개했다.
다음은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이다.
-귀순 과정에 대해 의혹이 일고 있다.
인천항에 들어올 때의 모습이 풍랑을 만난 사람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표정이 밝았는데 더 일찍 들어왔다가 22일 들어온 것으로 연극한 것은 아닌가.
▲지난해 3월 북한을 탈출한 뒤 중국에서 너무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남한으로 가기 위한 돈을 모으기 위해 농촌과 식당, 임야에서 일했다.
다행히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남한으로 오게 됐는데 밀항선을 탔을 때의 긴장감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풍랑이 매우 심했으며 특히 아이들의 멀미가 심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겪고 인천항에 들어왔을 때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표정이 밝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또 귀순자로 보기에는 옷차림이 화려했던 것은 탈북자라는 표를 내지 않기 위해미리 깨끗한 옷을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연극은 없었다.
-해광군이 일기를 쓰게 된 배경과 출처를 밝혀달라.
▲김해광= 두만강 부근에 도착해 방랑생활을 했을 때부터 먼 훗날에도 이 일을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쓰게 됐다.
중국 체류 당시 「한국의 선생님들」이 일기를 가져간 적이 있다.
이후 다른 선생님들도 일기를 가져가려고 해 형과 어머니가 내 일기를 베껴 건네줬다.
당시 우리를 도와준 「박사장」이라는 분이 「일기를 써야 한국에 빨리 갈수 있다」고 해 틈틈히 수첩에 적어둔 메모를 바탕으로 일기를 썼다.
-중국 체류 당시 자녀 학비는 어떻게 마련했나. 또 밀항 당시 깨끗한 옷을 입고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김영진= 중국에 있을 때는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만 돈을 벌었으며 학비는마련하지 못했다.
밀항할 때 도와줬던 사람들이 남루한 옷을 벗기고 새옷을 사 입혀줬다.
-김씨 가족과 함께 귀순한게 된 경위는.
▲유송일= 김영진씨 가족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배에 탑승할 때 알게된 김씨 가족을 보고 이들도 한국에 가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이들이 북한을 탈출하게 된 경로 등은 섬에 도착해서나 알았다.
-귀순 시점이 분명치 않은데
▲김영진= 배 선창 밑에 숨어서 왔기 때문에 시간 개념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안전하게 도착하겠는가 또는 이 배가 한국으로 가긴 가는 것인가 하는 염려만 있었다.
어느날 선원들이 「한국까지 데려다 줘야 하는데 풍랑으로 시간이 늦어졌다」며 배에서 내리라고 했다.
당시 배가 고팠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지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섬에 내려 지나는 배들에게 「살려주세요」하며 구조를 요청했다.
큰배가 도착했으나 가까이 접근을 하지 못하고 보트를 보내 「어디서 왔는가」하는 것을 물었다.
배에 쓰여진 글자가 북한의 글자와 달랐기 때문에 한국에 왔긴 왔구나 하는생각이 들었다.
보트를 타고 건너가는 때까지 30분 정도 걸렸다.
배에서 해경의 헬기를 타고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귀순동기는.
▲유송일씨= 저는 24년간의 군복무 시절에 남한 방송을 들으며 남한 사회와 귀순자들의 삶을 잘 알고 있었다.
94년 제대후 청진 오중흡대학 후방부 관리과에서 근무하던 도중 95년 1월께 사무실에서 노동신문에 난 남조선 청년학생들의 쌀시장 개방과 쇠고기 수입 반대시위 관련 기사를 읽었다.
기사를 읽으면서 남조선은 왜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냐고 차라리 그 고기 북한에 보내주면 좋을텐데 하고 생각한 적도있다.
결정적으로는 그해 8월에 상급자인 경리부 합장과 다툰 적이 있었는데 경리부 합장이라는 사람이 직위를 이용해 부하직원들을 마음대로 뗏다 붙였다해 이 문제로 다퉜다.
이때부터 그가 사회안전부에 있는 아는 사람들을 동원해 저를 모해하기 시작해 급기야 11월에 黜黨당했고 직장에서도 해고당한뒤 노동자로 전락했다.
이때 저는 김정일을 위해서 24년동안 군에서 충성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출당-해고-노동자로 떨어지자 불만이 생기고 더이상은 김정일 체제아래서는 희망과 미래가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한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준비를 했다.
-탈출경로와 나머지 가족은.
▲유송일씨= 3월4일 어머니 처 아이들을 데리고 청진을 출발해 남양에 도착했다.
군복을 입고 제대증명서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었다.
두만강 기슭에 도착해 경비상태를 살피고 빈틈을 발견해 달밤에 가족들을 데리고 무사히 강을 건넜다.
심양에서 동포집에 돌아다니며 묵었는데 우리는 북한을 넘어올때 북경에 있는한국대사관만 가면 무사히 한국에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북경의 한국대사관에 찾아갔을때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나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로 다투고 헤어졌는데 처가 북경역에 이틀동안 나타나지 않아 결국 혼자 심양으로 돌아왔다.
또 어머니는 북한에서도 몸이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중국에서 이집저집을 돌아다니는 사이 건강이 악화돼 지난해 6월 돌아가셨다.
-북한이 최근 어떻게 유동인구를 통제하고 있는가.
▲김영진=이전에는 통행증만 제시하면 목적지까지 가는데 큰 문제가 없었으나최근에는 사회안전부나 정치보위부 등 여러군데서 승인을 얻어야 하며 구체적인 체류일정과 목적 등이 해명되어야만 통행이 가능하다.
또 주민이 행방불명되면 곧바로 안전부에서 사진을 배포, 수배하고 있다.
-국경을 통과할 때 안전부 요원을 만났을텐테 「통행료」라는 것을 주었는가.
▲유송일=나는 군대에서만 24년을 생활했다.
때문에 경비의 허점이 어디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파악할 수 있었다.
두만강을 건널 때 안전부 감시의 눈길을 피했으며 통행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북한을 탈출할 때 조선돈 1만5천원을 준비했는데 이는 안전부 요원을 매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에 머물면서 조선족들 집을 전전했다고 했는데 다른 탈북자들을 만난 적이 있는가. 또 안기부 직원과 접촉했는가.
▲유송진=다른 탈북자는 보지 못했으며 안기부 직원과도 접촉한 적이 없다.
-김일성의 처 김성애 남동생과 사돈간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김영진=아주 먼 친척중에 김성애 남동생과 사돈이 있다.
내가 김성애 남동생과 사돈간이라고 중국에서 소문을 낸 이유는 북한고위층이라면 한국 입국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북경의 한국대사관에 2번이나 찾아갔다가 푸대접을 받았다고 하는데. ▲김찬옥=첫번째 북경에 갔을 때는 대사관을 찾지 못해 돌아왔다.
두번째는 용케 대사관을 찾아 (망명을 위한) 접수를 하고 대사관 직원도 만났으나 중국과의 외교관계 등 때문에 도와주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